농당길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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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 형 18주기를 맞아...

  • 길벗
  • 2007-03-08 11:4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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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문학반 활동을 함께 했던 기형도 형이 세상을 뜬지 18년이 되었다.
며칠 전 성석제 형으로부터 올해 추모 모임이 3월 5일 안성 천주교 공원 묘지에서
있다는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그러나 올해도 일이 겹쳐 못갔다.

매년 3월 첫 일요일이면 우리는 기형도 형 추모 모임을 늘 그곳에서 갖는다.
우리란 대학 때 함께 연세문학회에 속했던 친구와 선후배들을 말한다.
또 형의 친누나인 기애도와 매형도 당연히 오고 그외 형과 가까웠던 회사와
문단의 선후배들도 모인다. 형과 중앙일보에서 같이 문화부 기자를 했던
박해현 기자(현재 조선일보 문화부 차장)도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사람 중 하나이다.

오늘이 바로 형 가신지 18년이 되는 기일이다. 아침에 동아일보를 보니 기사가
실렸다. 그러고보니 세월 참 무상하다. 형이 급사하기 바로 이틀 전에 우리는
광화문에서 바둑을 두고 당구를 쳤었다. 이영준 형(당시 민음사 편집장), 성석재 형
(소설가), 이성겸 형(문예진흥원 부장) 등이 그날 저녁에 놀이를 함께 했던 사람들이었다.

난 당시 부천의 한 고등학교에 교사로 재직 중이었는데 아직도 그날 아침에
전화로 통보받은 형의 죽음 소식에 종일 수업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형은 그때 무명 시인이었으나 요절한 후에 낸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이
폭발적인 관심을 받아 이제는 밑의 기사에 나온 것처럼 신화 비슷하게도 되었다.

그러나 내 기억 속의 형은 참 다감하고, 재주 많았던 좋은 선배였고 무엇보다도
인간미가 진한 사람이었다. 노래는 형의 특기 중 하나였는데 중앙고등학교 때
형이 속했던 남성 4부 중창단 \'목동\'은 전설이었다고 한다. 대학 시절 형이 술자리에서
주로 부른 18번은 조영남의 \'내 생애 단한번만\'이었다. 지금도 형의 그 미성과
고음에서 가느랗게 떨리는 바이브레이션은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경지였다고 추억한다.

재주 없는 나야 늘 기라성 같은 선배들 틈에 끼여 술자리 말석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그래도 선배들이 늘 나를 챙겨주고 자리에 불러주었던 것을 생각하면
재주없는 후배를 인간적으로 많이 아꼈었나보다.

그때 학창 시절에 함께 어울려 다녔던 선배, 친구들은 거의 다 등단을 했다.
나야 워낙 분주한 사람이라 문학에 골똘히 몰두할 여유가 없었기에 또 재주가
천박했기에 등단은 애시당초 꿈도 꾸지 않았다.
그저 세상에 나와 이렇게 재주 많고 훌륭한 선배들과 늘 함께 지낼수 있는 것만으로도
언제나 행복하고 또 즐거운 추억으로 여긴다.

형과 함께 찍은 사진이 없는 것이 좀 아쉽다. 다른 선배들과 찍은 것은 많은데
2년 선배인 기형도 형과 나는 서로 군대를 엇갈려 가고 오는 바람에 그렇게 된 것 같다.
내 결혼식 사진 속의 형 모습은 당시 형이 중앙일보 정치부 기자를 할 때였던 것 같다.
그때는 5공 시절이어서 형은 모임이 있을 때마다 정치계의 뒷얘기들을
재밋게 들려주곤 했는데 특히 부산으로 김무곤 형(현 동국대 신방과 교수) 결혼식에
참석하러 대절 버스를 타고 서울서 내려갈 때 버스 속에서 내내 쉴새 없이 무슨
희곡 같은 당시 정치판 가십을 들려주던 형이 생각난다.

형의 기일을 맞아 아침에 혼자 오랫만에 형 생각을 하며
넋두리를 해보는 것이다.

선배, 우리 다시 보는 날까지 그곳에서도 많은 사람 울리고 웃기며
즐겁게 보내십시다.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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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2007년 3월 8일자 기사

[책갈피 속의 오늘]1989년 시인 기형도 영화관서 변사


영화는 진작 끝났다.


아직도 자리를 뜨지 않은 손님. 고개는 꺾여 있었다. 영상(映像)에서 영원으로. 기형도는 스스로 노래했듯이 “가면을 벗은 삶”(시 ‘겨울 눈 나무 숲’)으로 떠났다.


1989년 3월 7일 새벽, 종로 파고다극장. 사인은 뇌중풍(뇌졸중)이었다.


4년 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무명 시인. 8일자 신문의 짤막한 기사는 그를 기자라 불렀다. 엿새 뒤가 스물아홉 번째 생일. 서른, 잔치가 끝나기도 전에…. 시집 ‘입속의 검은 잎’이 나온 건 두 달 뒤였다.


“나의 영혼은/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누가 나를/펼쳐볼 것인가.”(‘오래된 書籍’)


절망의 고독. 펼쳐든 이들은 숨이 멎는 듯했다. 단조의 독창이 잔뜩 웅크린 채 폐부를 찔러 왔다. “절망이 빚은 환시(幻視)의 아름다움”(평론가 강계숙)이다.


1980년대는 문학계도 전쟁터였다. 암울한 현실이 생경한 줄긋기를 부추겼다. 누구는 일어섰고 누구는 등을 돌렸다. 적과 동지의 구별이 너무도 분명했다.


“나는 당황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당황할 것이다”(‘오후 4시의 희망’)


살벌한 경계선에서 시인은 무너짐을 노래했다.


동년배의 공감은 도화선이었다. 1990년대 세대에게 ‘기형도’는 신화로 폭발한다. 우울한 존재의 부유(浮游)에 젊음은 열광했다. 기형도는 그들에게 보들레르이자 베르테르였다. 청춘의 아이콘이었다.


“그때 나의 노래 죄다 비극이었으나/단순한 여자들은 나를 둘러쌌네/행복한 난투극들은 모두 어디로 갔나/어리석었던 청춘을, 나는 욕하지 않으리.”(‘가수는 입을 다무네’)


창공의 별이 됐지만 신화의 일상은 소탈했다. 유년의 상처에도 배려심이 깊고 치우치지 않았다. 그 흔한 주사(酒邪)도 없었으며 대화는 온화했다. 벗들과 자주 어울렸고 노래를 즐겼다. 베르테르의 극단도, 보들레르의 타락도 그의 몫은 아니었다. 다정한 친구이자 좋은 형. “죽음으로 신화가 된 게 아니라 시 자체가 신화”(김춘식 동국대 교수)다.


짧은 만남에도 이별은 있다. 떠날 사람은 떠난다. 흔적은 지워지기도, 화상이 되기도 한다. 기형도는 지금도 진행형이다. 시가 괄시받는 요즘도 한 달에 1000부 이상 팔린다.


“아아, 하나의 작은 죽음이 얼마나 큰 죽음들을 거느리는가.”(‘나리 나리 개나리’)


신화가 아니라 시대를 함께 호흡한 좋은 시인이었기에 흔적은 갈수록 커진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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