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빈이와 주엽이. 얼마나 이쁜지.

우리집 마당에서 명수네 가족
누구나 그렇겠지만 이제까지 살면서 참 많은 \'친구\'를 두었다.
어릴적 유치원 동창에서부터 초등학교, 중학교.... 대학원, 또 사회 친구까지.
그런데 와인과 친구는 오래될수록 좋다는 말처럼 그 많은 친구 중에서도 초등학교 동창은 좀 특별하다는 생각이 든다.
초등학교 3학년부터 중학교 2학년까지 같은 반이었던 명수가 처음으로 가족과 함께
우리 집에 왔다. 중학교 졸업 후 명수는 영월에 있는 공업고등학교로, 나는 춘천으로
고등학교를 가는 바람에 그 이후엔 만나지 못했다. 92년 무렵 우연히 연락이 닿아
서울에서 두세번 보았다가 그 이후 다시 연락이 끊겼다. 그러다가 십몇년 만에 이렇게
또 만난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명수는 키가 작다. 그러나 키가 작아서 못하는 일은 없었던 것 같다.
축구도 잘했고 공부도 잘했다. 70년대 초중반에 강원도 산골에서 초등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월드컵 축구는 당연히 만화방에 빼곡히 들어앉아 시청해야 했다. 명수는 말도
많았고 잘했다. 특히 축구 해설은 누구보다 정보도 많았고 또 정확했다. 그때는 김정남,
차범근, 이세연(골키퍼), 이차만 등의 선수들이 국가대표로 활약했었고 세계적인
선수로는 단연 펠레가 우리의 우상이었다. 유세비오라는 선수도 기억이 난다.
명수네나 우리나 가난하기는 매일반이었는데 그래서 점심을 굶는 때도 있었다. 내 기억에
번데기를 처음 사먹은 것도 명수와 함께였다. 시골에서 자랐어도 나는 그당시 누구나 먹는 메뚜기나 개구리, 번데기를 먹지 않았다. 좀 결벽증 비슷한 것이겠는데 하도 배가 고파서
하는 수 없이 하교길에 명수와 함께 번데기를 먹었던 것이다. 아마 빵 사먹을 돈은 모자랐고 그나마 번데기가 제일 싸서 그랬을 것이다.
중학교에 와서도 명수와 나는 같은 반이었는데 초등학교 때보다는 서로에게 관심이 덜했던 것 같다. 내가 보기에 명수는 자기는 키가 작은데 이상하게 덩치가 큰 친구들(운동부 애들이었다)과 어울리기 시작했고 공부는 좀 멀어진 것 같았다. 나는 그때도 키가 커서 중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씨름부에 들어오라는 압력을 받았다. 초등학교 때도 핸드볼 부에 오라고
하는 것을 끝까지 거부하여 결국 뺨 몇대를 맞고 풀려난(?) 적이 있는데 이번엔 씨름부였다. 운동에는 관심이 없어 또 끝까지 거부했더니 결국 엉덩이를 무수히 맞고 난 뒤에야
풀려나올 수 있었다.
아무튼 중학교 시절엔 명수와 이런저런 추억이 없는 것을 보면 그 조그만 학교에서도 소위 노는 물이 달랐던 것 같다. 그때의 나는 춘천고등학교에 입학하는 것이 지상의 목표였기
때문에 2학년 때부터는 새벽 4시에 일어나 공부를 하곤 했다. 당시엔 고등학교 시험이
있을 때였는데 강원도 정선에서도 신동읍 그 산골 중학교에서는 춘천고등학교에 매년
한 명 정도 갈까말까 하는 수준이었다. 춘천중학교에서 150명 이상이 진학하는 것과
비교했을 때 비교할 수 없이 큰 학력 차였다.
아마 명수도 유학갈 형편이 되었다면 나와 함께 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업계로 가야 한다는 생각에 아마 공부를 등한시하지 않았나 짐작될 뿐이다. 어쨌든
우리는 그 이후 각자의 길을 갔고 이제 40대 중반이 되어서 만났다.
명수는 지금 성공한 소기업 사장님이 되었다. 공고 전기과를 나와 한 십년 회사 생활을
하다가 나와서 독립을 한 것이다. 타고난 머리와 뚝심이 그를 지금의 안정된 삶으로
이끌었으리라 쉽게 짐작이 된다. 무일푼으로 상경해 이제는 강남에 넓직한 아파트도
장만하고 직원도 다섯명이나 둔 어엿한 사장님인 것이다. 돈 버느라 장가를 좀 늦게 가
이제 큰 딸이 초등학교 2학년이지만 정말 맘 착한 마누라와 그늘없이 자란 두 아이가
보배였다.
명수는 내가 우리 두 아이를 풀무농고에 보낸 것을 두고 놀라워 하면서도 나의 가치관에 대해 이해하려고 했다. 아마 우리나라에서 본인이 실업계를 나온 부모가 자식을 다시 실업계에 보내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그게 한국에서 살아본 우리 세대의 일반적인 생각일 것이다.
명수는 아이들이 어려서 이런저런 생각이 아직은 미치지 않을 것이다.
오랫만에 만나 밤 늦도록 얘기를 나눴다. 주로 옛날 초등학교 때 이야기다. 그러고보니
내가 잊은 것을 명수는 기억했고 또 나의 기억에 새로워하기도 했다. 지금도 어릴적 명수의
얼굴과 말하는 표정이 나는 또렷이 기억이 난다.
이제 한 가정의 가장이 되고 40대 중반의 나이가 되니 얼굴도 변하고 또 늙어가고 있지만
우리의 만남에서 만큼은 우리는 늘 초등학생인 것이다. 그러고보니 동창을 만나는 이유가 바로 젊어지고 싶어서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왜냐하면 각박한 세상에서 찌들고
힘들다가도 그때 만큼은 우리 모두가 어린아이가 되기 때문이다.
명수야, 네 얘기 좀 주저리주저리 썼다. 네 귀한 두 아이(예빈이와 주엽이) 말처럼 주말마다
놀러와도 좋다. 건강하고 사업 번창하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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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하리 어딘가에 자리를 틀고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언젠가 전해듣고나서, 이후 한번쯤
검색을 해 보았었었지...
그리고, 지금 서울생활을 하는중에 아주 빈번히 만나는 술친구 이명수로 부터 근간에 수하리를 방문했다는, 아니 조만간 방문하려고 한다는 이야기부터 또 방문하고 왔다는 이야기까지 .. 암튼 많은 부분은 아니지만 자네의 근래의 단면들 몇장면을 전해들을 수 있었네.
이명수가 다녀온뒤 아주 좋은 나들이였다고 입이 마르도록 이야기 하더군...
조만간 또 다녀올것이라고도 하고...
어느새 6년여의 세월이 흘렀구만... 적지 않은 시간을 새로운 곳에서 자리내림 하느라 많은 노고가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네... 부럽기도 하고 대단하다고 여겨지는 것 또한 사실이네..
난 자네와 이명수의 관계처럼 그 비슷한 처지에 있는 친구이네. ^^
제법 오래전, 서울에서 계획에 없이 어울리다가 자네집엘 다른친구들과 간적이 있었지..
그때 거실 한켠에 자리하고 있던 진공관앰프가 아직도 인상적으로 기억되고 있네...^^
송재복 이란 친구한테 농사지을 땅 타령(?) 하고 다닌다는 소릴 들은것도 벌써 제법 오래전 이야기 이구만...^^
정선 어디쯤에서 자리를 붙일줄 짐작했었는데, 홍천 서석으로 터를 잡았을줄이야...^^
많은 준비와 노고로 인해 어느정도 자리메김을 해가고 있는 것으로 여겨져서 다행스럽고, 또 흐뭇하게 생각되네...
앞으로 다가올 많은 날들도 자네가 바라는 대로, 원하는 만큼, 그렇게 이루어 지길 기원하겠네. 그래야 자네덕에 사과라도 한개 얻어먹을수 있지 않을까?? ^^
예빈이와 주엽이가 많이 좋아했을것을 생각하니 이명수가 애비 노릇을 아주 톡톡히 하고 온 그런 나들이가 아닌가 여겨지네. 이 또한 자네가 그럴듯한 곳에서 보기좋은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겠지....
생전 처음으로 몇줄의 글을 자네에게 적어 보았네. 좀 뻘쭘하기도 하고..^^
아버님과, 식구들, 그리고 자네의 건강을 기원하며 서울사는 별로 친하지 않은 친구가 안부글 보내네... ^^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