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당길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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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아들 현이의 편지

  • 길벗
  • 2006-05-06 10: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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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무학교 교정

아들 둘이 다니는 풀무학교에서는 매년 5월 어버이날 행사를 합니다. 대개 어린이날과 어버이날 사이에 하루를 잡아서 아이들이 준비한 공연을 하고 저녁에는 부모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 2-3일간 휴가를 갖는 것입니다. 행사가 있는 날 바로 전날 저녁에는 오랫만에 학부모 총회가 열립니다. 부모님들이 하룻밤을 지새면서 학교 얘기, 아이들 얘기와 아이들에게
지원할 것들에 대해 토의하고 또 결의합니다.

현이 1학년 때 본 행사에만 참석하고 작년에는 참석하지 못하여 올해는 학부모 총회와
행사에 모두 가보려고 서둘렀지만 예상치 못한 사고가 생겨 결국 학부모 총회에는 올해도
참가하지 못하고 행사 당일 담임 선생님만 뵙고 말았습니다.

현이가 학부모날 행사 열흘 전 쯤에 집에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제가 먼저 보낸 서신에 대한
답장이었습니다. 우리 부자는 편지를 자주 하는 사이는 아니여서 일년에 한두번 편지를 왕래합니다. 더 자주 전화로 그때그때 안부를 서로 묻기 때문이기도 한데 마음만은 늘 편지를
쓰고 싶고 또 받고 싶기도 합니다. 그저 게을러서 많이 못씁니다.

현이의 편지를 여기 올리는 것은 바로 이전의 민환이 글을 올린 것에 대한 연작(?)의 형태
이기도 하고 또 우리 아들이 풀무 속에서 바르게 성장해가는 것을 축하해주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올해 풀무 학부모회에서는 어버이날을 맞아 부모와 자식이 서로 편지 주고받기
행사를 따로 꾸며 학교 게시판에 모든 편지를 붙여놨는데 우리 부자는 미리 서로 주고 받은 관계로 학교 학생관 게시판에 올리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또 여기에 올리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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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에게

학교에서는 되도록이면 \'아버지\'라 부르는 게 좋다고 하지만 아직은 \'아빠\'가 더 좋아요. 편지는 잘 받았습니다. 솔직히 감동이었어요. 특히 친구같이 지내자는 말에요. 저도 아빠랑 같은 생각입니다. 처음에는 눈물이 나왔지만 지금은 기쁜 마음입니다. 아빠 엄마에게 보내려고 써놓은 편지가 세 통도 넘는데 결국 모두 못보내고 말았었는데 아빠한테서 먼저 편지가 오다니.

철이 늦게 들어 부모님이 뭔지 생각하지 못하여 지금까지 너무 막한 게 아쉽고 부끄럽습니다. 전 타고나길 독립심이 강한 것 같아요. 중학교 때 키워진 자립심이 있고, 그때 기숙사에서 생활한 게 어떤 면에선 아쉽기도 하지만 오히려 절 단련시키고 키워준 면도 많고 제가 볼때 사춘기 때의 어려운 시절을 그나마 무난히 넘길 수 있었던 것도 기숙사 생활 때문인 듯 싶습니다. 오히려 이런 삶이 아니었다면 스스로를 단련시키지 못하고 삐뚤어져 버렸을지도 몰라요.

지금 이렇게 아빠, 엄마랑 그리워하는 것도 오래 떨어져 산 탓이니 앞으로는 잘하면 되죠. 지금까지 사랑이 뭔지 몰라 혼자 아파하고 힘들어 했는데 이제는 환해졌습니다. 지금까진 \'왜이럴까\'했지만 이젠 아닙니다. 앞으론 사랑이 가득하잖아요.

풀무는 엄청나게 바쁜 곳입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그렇습니다. 저는 학우회장이나 학생장은 아니지만 생태부장, 사진반장, 신문 만들기 모둠장을 맡고 있습니다. 풀무를 흔히 공동체라 하지요. 학교일의 대부분은 저희들이 이끌어 갑니다. 학교를 위해, 학생을 위해 해오던 일을 잘 꾸려나가고 또 안되는 부분에서는 새로운 시도를 해나갑니다.

저는 그러니까 3학년 모두와 함께 이런 일들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실습도 해야 하고, 학교 숙제와 공부, 보고서도 써야 하고, 실습 당번도 해야 하고 부서 활동도 책임져야 합니다. 정말 정신없는 나날들입니다. 생태부는 창고와 분리 수거 일을 맡고 있는 데 날마다 일이 끊이지 않고 신문 만들기도 매달 한부씩 만들어 내야 하기 때문에 꽤 자주 모이고, 다음 주는 실습 당번에 생활반 당번이네요.

매달 해야 하는 과학 과제는 밀리면 안되지만 실습일지는 벌써 2주차나 밀렸고 보고서도 세 개나 못썼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전 책을 몇 권 붙잡고 읽고 있습니다. <소설 목민심서>, <간디 자서전>, <땅이름 기행> 등 다양한 분야의 책들입니다. 아, 그래서 공부는 뒷전이 되네요. 앞으로는 열심히 계획대로 해보려고 노력해볼께요.

공부는 좀 안되도 요즘 매일 자기 전에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합니다. 아침에도 예배가 끝나면 밥 먹기 전에 강당에 남아 기도를 합니다. 아빠가 원칙 얘기를 했죠? 제 원칙은 이렇습니다.

\'사랑한다. 모든 행동, 생각, 말에는 사랑이 있어야 하고 사랑이 바탕이어야 한다. 사명을 잊지 않는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질문하고 생각하며 의식한다. 그리고 내 사명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항상 기도한다.
항상 감사한다. 자연을 들여다보고 내가 그 속의 한개 고리일 뿐임을 인식하며 또한 같이 내가 그것들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중략-....  원칙을 지키며 기억하라. 원칙주의자가 돼라.\'

작년에 제 수첩에 적어놓은 것입니다. 선거 기간에 쓴 것이지요. 중간 부분에 \'모든 일에는 뜻이 있다. 항상 나보다 힘든 사람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포기하지 않는다. 치우치지 마라, 꿈을 놓지 마라\' 등이 적혀 있는데 그런 건 나중에 좀더 덧붙인 것입니다.

사실 이런 것들을 항상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이걸 쓴 제 마음은 제가 기억하기 때문에, 그리고 이젠 의식하지 않아도 제 사고 방식의 바탕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가끔씩 읽어보며 마음을 추스리기도 합니다. 솔직히 풀무에서 배우는 것들 가운데는 저것보다 큰 게 많기 때문에 정신없이 살기도 하지만 결국엔 그것들도 위의 말과 하나입니다.

저도 아빠에게 한가지 꼭 말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바로 \'이상\'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저만의 생각이긴 하지만 젊은이는 이상과 꿈을 먹고 큰다고 생각합니다. 큰 사상, 위대한 꿈들, 이상을 실천하려 했던 사람들, 그리고 소박함. 그런데 한국 교육은 이런 것들에 대해 무관심하고 외면합니다. 그래서 젊음은 먹고 살 궁리만 하며 남들보다 겉보기에 잘 살기 바라고 개인주의가 자랍니다. 그래서 방황합니다. 아빠가 방황을 했다면 제 생각에는 이상이 없어서 입니다. 저는 쉽게 꿈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난 이런 사람과 결혼해서 이런 일을 하며 이런 삶을 살고 싶다\' 여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세상을 좀더 아름답게 만들어야겠다는 꿈.

아빠에게 한 권의 책을 권합니다. 그물코 출판사에서 나온 고다니 준이찌 선생님이 쓰고 홍순명 선생님이 번역하신 <농부의 길>이란 책입니다. 제게는 농부의 길이야말로 단하나 가치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풀무에서의 삶을 즐겁고 의미있게 보내는 것도 중요하지요. 그리고 아빠와 엄마도 그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묵학시간 동안 멈추지 않고 썼습니다. 편지 쓰려고 전화는 안했어요. 다음번에 전화할께요.

2006년 4월 23일 아들 길 현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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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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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금성 2006-05-07
    현이의 글을 잘 보았습니다. 해뜨리 어머니와 해뜨리도 보았습니다. 단단한 현이의 마음 세계를 보며 해뜨리보고 그랬습니다. 너, 참 좋은 동무와 지내니 복이 많구나. 함께 멋진 풀무 시간을 보내라, 했습니다.
  • 길종각 2006-05-07
    행사날 해뜨리를 보았습니다. 현이와 함께 좋은 추억 많이 가꾸고 잘 지내라고 해뜨리에게
    말했습니다. 아이들이 풀무에서 잘 성장해가서 무엇보다 기쁩니다. 회장님 말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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