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당길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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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이야기-이별(1)

  • 길벗
  • 2006-03-27 23: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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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와서 농부들이 손발을 부지런히 움직여야 할 때인데
우울한 소식 두 가지가 있다.
그동안 이 타향에서 만나 친하게 지내던 두 농부가 떠난다는 것이다.

한 농부는 그야말로 IMF 귀농인이었다. 멀리 삼천포에서 사업을
꽤나 크게 하던 사람이었는데 그만 부도를 맞고 말았다고 한다.
워낙 타격이 커서였는지 이곳에 올때 온가족이 몸만 왔다고 했다.
그게 98년 여름이었다고 한다. 어찌 그 먼 곳에서 이 궁벽진 강원도까지
왔느냐고 했더니 답답해서 이곳에 아는 사람 찾아 잠시 왔다가
그만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농사일을 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하긴 더이상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상황에서 도시에서는 달리
선택할 그 무엇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이곳에서는 허름한 옛날 집이긴 해도
집과 그리고 집에 딸린 밭이 2천 평 정도 되니 일단은 몸을 의지할만
했었는지도 모른다. 서석은 그때부터 이미 여름 오이로 가락동 시장에서
주가를 올릴 때여서 오이 농사 잘만하면 입에 풀칠은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땅에 중고 비닐하우스를 짓고 두 부부는 생전 경험해보지 못했던, 아니
생각지도 못했던 오이 농사 전업 농부가 된 것이다. 다행히 바로 이웃에
오이 박사인 장로님이 계셔서 수시로 가르쳐주고 들여다보아 주어서
그래도 초보 농사꾼이 시작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때 큰 딸은 중학생 둘째 딸과 막내 아들은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다.
우리가 그 부부를 만난 것은 2001년 여름이었다. 그러니까 그 분들이 온지
3년째 되던 해로 나는 그 부부가 오이 농사 밭 외에 또 임대해서 짓고 있던
3천 평 밭을 살까해서 보러 온 것이었다. 그때 그 밭에서 처음 그 부인을
보았는데 귀농 3년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곱고 도시태가 가시질 않아서
첫눈에 이곳 토박이가 아님을 알아보았다.

결국 그 땅이 아닌 지금의 이 땅을 사게 되었지만 그렇게 알게 된 그 부부와
계속 만남이 이어졌고 결국 나보다 5살이나 위인 그 남편을 나는 형이라
부르고, 그 부인을 우리 안사람은 언니라고 부르는 사이가 되었다.
비록 타향에서 나이 들어 만난 인연이지만 정말이지 마음 속 깊이 존경하는
형과 형수였다.

두 사람은 자식들 사랑이 지극했다. 자기 땅 한 뼘 없는 이 타향에서 임대
농사를 지어 삼남매를 줄줄이 학교를 보내는데, 그 고생을 하면서도
끝내 두 사람의 입에서 험한 말이 나오는 것을 나는 한번도 듣지 못했다.
그리고 경상도 사나이답게 목소리도 크고 때로 흥분도 잘 하지만 두 부부가
싸우는 것을 한번도 본 적이 없다. 그리고 신세 한탄을 하는 것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저 주어진 현실 속에서 항상 최선을 다해 농사를 지어보려고
했던 것 같다.

처녀 때 은행원을 했다는 그 형수가 그렇게 밭일을 열심히 하는 것을 보고
우리 부부는 괜히 부끄러워했다. 무엇보다도 당신들이 힘듦을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아는데 이 부부는 항상 우리 걱정, 또 이웃 걱정을 하는 것이다.
도대체 이렇게 선한 사람들이 왜 아이엠에프 때문에 사업에 큰 위기가
왔을까. 자세히 물어보지도 또 말하지도 않았지만 사람 좋아하는 그 형이
큰 보증을 섰다가 다 날린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또 무리하게 확장하다가
그리 된 것도 같다. 둘 다 일수도 있다.

아무튼 두 사람은 겨울이 되면 도시로 나가야했다. 강원도의 겨울은 길고
길어서 그저 집에서 군불 때고 들어앉아서 시간만 축내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들은 장승같이 자라고 또 돈은 풀방구리
처럼 물어다 쓰는데 수입이 없는 것이다.

겨울 한 철 도시에 나가 월세방을 얻고는 형은 가구 공장에, 형수는 병원
식당에서 일을 했다고 한다. 그 사이 아이들은 이모나 할머니 댁에 가서
방학을 나야 했다.

그런데 이렇게 열심히 살아도 농사를 지어서는 감당할 수 없다는 결론,
하긴 이 결론이 이제사 난 것은 아니다. 진즉에 결판은 난 것이지만
그래도 어물어물 8년을 끌어온 농사인데다 도시에 나간들 뾰족한 수가
없어서 그간도 국으로 눌러 앉아 있었을 뿐이다.

작년에는 특히 농산물 값이 형편없었다. 대개 나빠도 뭐 한가지는 좋게
마련인데 작년에는 오이도, 토마토도, 감자도, 고추도 도무지 이 강원도
홍천에서 짓는 농작물 가운데 농민들 생계를 유지시켜 줄만한 것이
없었다. 형도 남의 밭을 더 늘려 임대하여 오이도 하고 브로콜리도 하고
토마토도 하고 심지어 피마자 재배까지도 동시에 했다.

내가 알기로 두 부부가 허리가 휘도록 일했다고 하면 맞는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작년 가을, 결산을 해보니 도무지 먹고 산 것 외에는 남는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다가오는 겨울은 또다시 도시로 나가야 한다는
막막한 사실. 결국 두 사람은 또 도시로 나갔고 우리는 몇 달 보지 못하고
전화만 가끔 나누었다.

큰 딸이 이번에 대학을 갔다. 다행히 공부를 잘해서 충북대학교 이과대학에
장학생으로 갔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도 합격을 했는데 집안 형편을
보아 장학금을 주는 지방대로 스스로 간 것이다.

형과 형수는 어제 마지막으로 남은 짐을 1톤 차에 싣고 직접 운전을
하여 대전으로 떠났다. 지난 겨울, 어찌어찌하여 대전에서 자리를
잡았는데 형은 학원 버스를 운전하고, 형수는 고급 일식집에 서빙일을
한다고 했다.

겨우내 일하다가 어제 겨우 시간을 내서 와서 정리를 하고 아주 떠났다.
그 사이 우리는 전화로 서로의 안부를 묻곤 했기에 더이상 불필요한
대화는 필요가 없었다. 서로 다 아는 사정 얘기.

'농사 보다는 나아?'
'백번 낫지(형수의 진한 경상도 사투리)'
'그래 잘 됐다. 이곳에서 자기 땅도 없이 고생하느니
그래도 거기는 일년 열두달 수입이 있잖어. 고생한 댓가가 따박따박
나오잖어'
'거~럼. 이제 농사는 지라 그래도 몬진는다. 지겨버서(역시 형수의 진한
경상도 사투리). 뭐, 고생한 댓가가 나오나 말이다.'

<그래, 형. 이곳에서 정말 고생 원없이 했수. 대전이 맘에 든다니
다행이고, 또 아이들 키울만한 수입이 된다니 정말 다행이야.
형수, 그 작은 체구에서 어찌 그리 사랑이 넘치우. 그간 우리 안사람이
정말 형수 좋아하고 따른 것 아시죠?
우리 정말 우연히 만나 그간 친한 이웃으로 잘 지냈는데 이제 이렇게
떠나니 뭐라 할 말이 없수. 그래도 핸드폰이 있으니 아무때나 보고 싶을땐
목소리 듣고, 또 우리 약속했던 대로 여름 휴가는 우리 집으로 오면 만날 수
있으니 이민 간 것 보다는 훨 낫네. 형, 형수 다시 보는 날까지 서로 열심히
삽시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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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다른 이웃 귀농 부부가 현재 이곳을 뜰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농사 9년차.
  이유는 역시 농사는 힘만 들고 생활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다음 이야기에
  쓰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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