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이야기

농사이야기

창피한 이야기

  • 길벗
  • 2021-11-12 19: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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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야리 부사밭 가운데 가장 오래된 11년생 나무가 있는 곳. 안사람과 둘이서 열흘째 따고 있는데 이제 겨우 그 끝이 보인다. 안사람과 둘이서 먼저 서서 아랫쪽 사과들을 죽 따고 이어서 고소작업차로 윗부분 사과를 따는 순서다. 이제 고소작업차로 세 줄만 더 따면 이 부사밭 사과는 다 딴다.

 

올해 사과농사는 말하기 창피할 정도로 형편 없습니다.

생각해보면 그간 지은 경험과 지식으로 아주 농사를 잘 지어야 함에도(지을 수 있음에도) 결과는 별로 좋지 못하니 창피한 일입니다.

올 봄, 극심한 인력난에 그저 안사람과 둘이 이 넓은 과원을 쉬엄쉬엄 적과를 했습니다. 목숨 걸고 달려들지는 못한 것이 그것은 아마 성격 탓일수도

아니면 그래봤자 별 것도 없을 것이라는 자포자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유야 어떻든 그 덕분에 올해 부사 사과는 모두 잔챙이 사과입니다.

하기는 올해부터는 사과즙 가공과 애플사이더 제조를 해야 하니 생과 판매를 못할 수도 있다는 예상도 했지만 그러나 냉정히 얘기해서

우리나라 과수농사는 생과로 팔아야 돈이 되고 생계가 됩니다. 그런데... 수확철에도 이집 저집에서 일손이 부족하다는 비명만 들릴 뿐 도무지

인력을 구할 수 없는 상황은 봄과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니 '만약' 크고 때깔이 좋은 사과를 주렁주렁 달았다고 해도 과연 누가 사과를 제 때 딸 것이며

선별은 누가 하고 또 박스 작업을 해서 택배를 할 것이냐 하는 문제는 여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결국 농사꾼으로서 할 얘기(변명)는 아닌 것이 그 어떤 상황이 와도 농사를 잘 지어야 진정한 프로 농사꾼이 아닐까 하는 생각.

결국 세월은 많이 흐르고 이곳에서 사과와 함께 20년간 젊은 날을 보낸 저도 그저 이유나 늘어놓고 있으니 창피한 노릇입니다.

이번 가을부터 이웃 사과농부들 가공품 사과를 받아 사과즙 가공을 해주고 있습니다. 사과 따는 일 사이사이 그 일도 해주어야 해서 사과 따는 일을

몰아서 하지 못합니다. 사과즙 공장을 짓고 이제 본격적으로 사과즙 가공을 해주는데 이 일 역시 만만한 일은 아닙니다.

아침 7시부터 사과 세척을 시작으로 하루 일이 시작되면 오후 5~6시, 늦으면 저녁 8시에나 끝납니다. 그런데 하루 일이 끝나고 나면 반드시 기계 세척을

해주어야 합니다. 해보니 3시간 걸립니다. 대충 할 일이 아니기도 하고 생략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보니 그저 전 라인 기계들을 모두 깨끗이 닦습니다. 

 밤 10시나 11시에 집에 들어와 씻고 잠이 듭니다. 이제껏 살아온 인생에서 이렇게 일을 해본 적은 없습니다. 회사 다닐 때 야근을 많이도 했지만 그래도

아침 7시부터 사무실에 앉아서 시작한 적은 없으니까요.

사과즙 가공일이 없는 날은 사과 수확하러 안사람과 와야리 사과밭으로 아침 먹고 떠나면 점심도 들판에서 대충 빵으로 때우고 오후 4시경에나 집에 

돌아옵니다. 해가 짧으니 그렇습니다. 종일 딴 사과를 트럭에 싣고 집에 와서 다시 저장고에 옮기고 나면 어두워집니다.

이런 나날이 벌써 보름째 이어지고 있으니 TV뉴스도 못보고 그저 잠자리에 들기 바쁩니다. 이런 와중에도 그 놈의 책 사는 버릇은(읽는 버릇이 아니고)

못버려서 계속 주문을 해대는데 대충 목차만 보고 나중을 기약하며 책장에 둡니다. 지난 주에는 교보문고에서 제가 골드 회원이 되었다고 문자가

왔습니다(프렌즈->실버->골드->플래티넘). 이것도 창피한 일입니다. 돈도 못 벌고, 책도 읽을 시간도 없는 주제에 등급만 높아진 겁니다.

덕분에 무료주차 2시간권 혜택을 받았습니다.

작년 올해 연이어 두 해를 사과농사를 망치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홍로과원은 올해 무농약 인증을 받았습니다. 계획은 좋았습니다. 하긴 늘 계획이

나쁜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추석 홍로사과도 하나도 못팔고 이제 부사사과는 모두 꼬맹이라 내놓기도 창피하고, 그래도 꼬맹이라도 좋으니 

보내달라는 지인들이 있어 안사람이 꾸역꾸역 사과박스를 꾸립니다.

이제 며칠 더 따면 끝날 것도 같은데 마지막 남은 부사사과 한 구역은 모두 애플사이더 용으로 하려고 그저 눈이 올 때까지라도 따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올겨울 애플아이스사이더도 시험을 해볼 요량입니다.

어서 이 바쁜 것이 끝나야 여름부터 벼르던 애플 스파클링 주스 시험 제작을 하고 곧이어 사이더도 만들어 시험을 해볼텐데 자꾸만 미뤄지고 있습니다.

매주 토요일마다 수수보리아카데미라는 맥주학교에 올라갑니다. 내년 1월 둘째 주까지 수업이 있습니다. 사이더는 맥주와 사촌이라 이곳에서 여러가지

유익한 정보와 지식을 얻습니다. 수업료도 비싸고 매주 서울 다녀오는 것도 경비며 체력이며 만만치 않습니다.

매일 바쁘고 몸이 피곤하다보니 홈페이지에 글 올리는 것도 아주 고역입니다. 역시 농사꾼은 그저 땅만 보고 살면서 해 뜨면 일어나고 해 지면 

주무시고 하는 단순한 일상이 어울리는데 이런 공간을 만들어 무엇인가를 끄적인다는 것도 어찌보면 사치라고 느껴집니다.

세상에 무수한 이름없는 돌맹이처럼 사는 게 저의 인생 모토인데 어쩌다보니 블로그와 인스타그램, 페이스북까지 요즘 유행하는 것들에는

죄 페이지를 만들어놓고 운영도 못하면서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한 가지 더 아쉬운 것은 나이도 나이려니와 바쁘다보니 자꾸 약속을 잊어먹게

됩니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실수를 합니다. 

이곳에 오시는 길벗 님들께 저의 이런 넋두리를 할 수 있다는 것이 그나마 유일한 낙일 것입니다. 이 골짜기에서 종일, 와야리 골짜기에서 종일, 

그러다보면 며칠을 안사람과 둘이서만 얘기하고 얼굴 보는 일도 가끔 있습니다. 그러니 허공에 대고 혼잣말을 할 수도 없고 여기에 와서 

주저리주저리 말이 되든 안되든 그저 숨이 붙어있다는 소식을 전하는 것이 제게는 유익합니다.

갈수록 무식해지고 갈수록 약해지며 갈수록 가난해지고 생각만 많아지는 요즘입니다. 그저 이름없는 사과농사꾼으로 이렇게 조용히 사는 것이 그러나 

너무 즐겁고 이 세상에 왜 왔는지는 모르나 가는 날까지 맛있는 사과를 생산하는 사람으로 남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게 잘 안되서 창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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