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이야기

농사이야기

후진 농사꾼

  • 길벗
  • 2021-09-06 18: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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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진 농사꾼, 명절 대목을 또 놓치다... 사과농사 20년인데 갈수록 농사를 못하니 이제 농사꾼이란 호칭도 반납해야겠다.

작년, 올해 홍로 농사를 망쳤다. 작년엔 오랜 장마에 약을 못치니 그랬고 올해는 무농약 한다고 설레발이 치다가 그만 실수를 하고 뒤늦은 냉해도 있었고...

핑계없는 무덤이 없지만서도 내가 생각해도 이래가지고는 사과농사꾼이라고 하기가 어렵다.

다행히 부사(후지) 사과는 그럭저럭 평년작을 했지만 홍로 농사 이렇게 지어가지고는 밥 먹고 살기 어렵다.

머리로는 다 아는데 왜 이리 홍로 농사를 망쳤나. 하긴 홍로 농사가 아주 잘 됐던 해도 있었다. 

그런데, 어느 해인가는 정말 밭에서 살다시피, 그때는 뭔가 기가 충만해서 온갖 정성을 다해 사과농사를 지은 해도 있었다. 

자부심을 가질만했으나 그러나 가을에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어느 해인가는 설렁설렁 대충 농사를 지었지만 평년작 이상을 했던 적도 있다.

귀농 20년, 사과농사 20년을 뒤돌아보고 생각해보니 나는 사실 농사에 최적화된 인간이 애초에 아니었다. 그럼에도 서른 살부터 왜그리 농사와 귀농에

끌렸는지 모르겠는데 아마도 도시생활의 염증, 직장생활의 한심함 그리고 약간의 무정부주의적인 사고 등등이 나를 이 골짜기로 이끌었지만

농사는 이런 식으로 아무나 생각나면 들어와 짓는게 아니다 싶다.

세상에 하고 많은 직업 가운데 농사를 가장 하질로 치니 누구나 '농사나 질까' 하는 소리를 쉽게도 한다.

그러니 요즘 같은 자격증 천지 세상에서 유일하게 그런 과정 없이 아무나 척 하고 할 수 있는게 농사 아닌가 말이지. 

아무튼 변명을 하자면 끝도 없겠거니와 올해 홍로 농사 망한 거 결론은 나의 무기력, 게으름과 똥고집 때문이라고 해두자. 

이상하게 수확철이 되면 결과에 관계없이 매년 내년엔 잘 할 수 있다는 오기가 불끈 솟아오른다. 머리 속엔 벌써 봄부터 여름까지의 작업 일정이

환하게 들어앉아 있다. 아니 겨울부터인가. 전정을 추운 겨울에 해야 하지 않나. 전정을 잘 해야 하는데 추운 겨울에 벌판에 나가 사다리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가위질과 톱질을 해보면 그거 나이 먹고 할 일이 아니란 걸 두 시간이면 깨닫게 된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과수농사꾼의 운명, 팔자인 것을. 애초에 오이, 애호박, 고추 농사는 한겨울에 그냥 고스톱이나 치는 팔자 편한 농사 아니겠는가.

올해부터 사과즙과 애플사이더가 공장에서 출하하게 된다. 내 것만 아니라 주위 사과농사꾼들이 가지고 오는 사과도 사과즙으로 가공을 해주어야 한다.

이건 공장 운영을 위한 당연한 수고로움인데 긴장이 안 될 수 없다. 아주 간단한 프로세스이긴 한데 그래도 기계를 다루어야 하는데다가 이 기계 중

포장기(파우치 포장)는 내 보기에는 19세기 유물이다. 같은 파우치 포장기라도 1대에 1억 정도 하는 아주 기막힌 기계가 있다. 그런데 우리 공장에 들어와

있는 건 5대 모두 합해서 2천만 원도 안하는 포장기계. 일일이 손으로 조이고 닦고 얹고 내리고 해야 하는 기계다.

어서 돈 벌어서 그 기계를 사야 하나? 누가 그랬다. 제조업, 그거 맨날 돈 벌어서 기계에 다 처바르고 만다고.

올해부터 결심은 외국 와이너리처럼 봄부터 가을까지는 농사짓고 겨울엔 술 만들고 그러기로 했었다. 그러니까 생과 판매는 아예 할 생각이 없었던 거다.

생과는 외관이 중요하다. 그래야 돈이 되니까. 그리고 포장과 택배. 이제 더는 그 일을 하기가 어려울 듯 하다. 이제 농촌엔 그런 일을 할 일손이 없다.

그러니 그 섬세한 작업을 누구와 할까. 그저 대충 농사지어서 모두 가공용으로 소비해야 하는 거다.

아무튼 명절이 다가오고 매일 두 세 통씩 전화나 문자가 오니 일일이 설명해드리고 양해를 구하는 일도 마음이 무겁다. 굳이 전화까지 해서 우리 홍로사과를

찾는 이들은 사상이 건전하고 인격이 훌륭한 분들이다. 우리집 사과맛을 아는 분들이니까...

사과즙과 애플사이더 가공 일도 진척이 느리다. 뭐든 내 마음대로 되는게 거의 없다. 일이 많다 보니 아차 하는 순간 하루가 가고 밤이 오고 몸은 이제

나이 들어 예전과 같지 않은 듯 하고 주량도 형편없이 줄고... 되어가는 형편을 또 쓰겠습니다. 이곳에 오시는 길벗 님들의 여전한 관심과 지도를 기다립니다.

 

엊그제 마지막 풀 깍기 전 어린 부사나무 과원. 이렇게 풀을 키우는 게으른 농사꾼은 전국에 없을 듯. 굳이 변명을 하자면 우리집 사과가 사과향이 유독 진하다는 분들이 많은데 나의 생각은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초생재배를 한 덕분으로 판단하고 있다.

올해 홍로사과 꼬라지. 모두 조막만하다. 이 줄은 그나마 좀 나은 게 이렇다.

공장 올라오는 길 일부 아스콘 포장. 사진 특유의 왜곡된 이미지로 뭔가 그럴 듯 해보이지만 사실 구멍가게. Y대 나왔다고 입구 길 모양도 Y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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