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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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꽃

  • 길벗
  • 2007-10-16 20: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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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설악산 단풍

가을꽃

미닫이에 불벌레 와 부딪는 소리가 째릉째릉 울린다. 장마 치른 창호지가 요즘 며칠 새 팽팽히 켱켜진 것이다. 이제 틈나는 대로 미닫이 새로 바를 것이 즐겁다.

미닫이를 아이 때는 종이로만 바르지 않았다. 녹비(鹿皮) 끈 손잡이 옆에 과꽃과 국화와 맨드라미 잎을 뜯어다 꽃 모양으로 둘러놓고 될 수 있는 대로 투명한 백지로 바르던 생각이 난다. 달이나 썩 밝은 밤이면 밤에도 우련히 붉어지는 미닫이엣 꽃을 바라보면서 그것으로 긴 가을밤 꿈의 실마리를 삼는 수도 없지 않았다.

과꽃은 가을이 올 때 피고 국화는 가을이 갈 때 이운다. 피고 지는 데는 선후가 있되 다 마찬가지 가을꽃이다.

가을꽃, 남들은 이미 황금열매에 머리를 숙여 영화로울 때, 이제 뒷산머리에 서릿발을 쳐다보면서 겨우 봉오리가 트는 것은 처녀로 치면 혼기가 훨씬 늦은 셈이다. 한(恨)되는 표정, 그래서 건강한 때도 이윽히 들여다보면 한가닥 감상이 사르르 피어오른다.

감상(感傷)이긴 코스모스가 더하다. 외래화(外來花)여서 그런지 그는 늘 먼 곳을 발돋움하며 그리움에 피고 진다. 그의 앞에 서면 언제든지 영녀취미(令女趣味)의 슬픈 로맨스가 쓰고 싶어진다.

과꽃은 흔히 마당에 피고 키가 낮아 아이들이 잘 꺽는다. 단춧구멍에도 꽂고 입에도 물고 달아 달아 부르던 생각은, 밤이 긴 데 못 이겨서만 나는 생각은 아니리라.

차차 나이에 무게를 느낄수록 다시 보이곤 하는 것은 그래도 국화다. 국화라면 으레 진처사(晋處士)를 쳐드는 것도 싫다. 고완품(古翫品)이 아닌 것을 문헌치레만 시키는 것은 그의 이슬 머금은 생기를 빼앗는 짓이 된다.

요즘 전발(電髮)처럼 너무 인공적으로 피는 전람회용 국화도 싫다. 장독대나 울타리 밑에 피는 재래종의 황국이 좋고 분에 피었더라도 서투른 선비의 손에서 핀, 떡잎이 좀 붙은 것이라야 가을다워 좋고 자연스러워 좋다.

국화는 사군자의 하나다. 그 맑은 향기를, 찬 가을 공기를 기다려 우리에게 주는 것이 고맙고, 그 수묵필(水墨筆)로 주욱쭉 그을 수 있는 가지와, 수묵 그대로든지, 고작 누른 물감 한 점으로도 종이 위에 생운(生韻)을 떨치는 간소한 색채의 꽃이니 빗물 어룽진 가난한 서재에도 놓아 어울려서 더욱 고맙다.

국화를 위해서는 가을밤도 길지 못하다. 꽃이 이울기를 못 기다려 물이 언다. 윗목에 들여놓고 덧문을 닫으면 방안은 더욱 향기롭고 품지는 못하되 꽃과 더불어 누울 수 있는 것, 가을밤의 호사다. 나와 국화뿐이려니 하면 귀뚜리란 놈이 화분에 묻어 들어왔다가 울어대는 것도 싫지는 않다.

가을꽃들은 아지랑이와 새소리를 모른다. 찬 달빛과 늙은 벌레 소리에 피고 지는 것이 그들의 슬픔이요 또한 명예이다.

- 이태준의 [무서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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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아침이면 옷깃을 여미는 한기가 느껴지는 골짜기에서
가을이 또 오고감을 무감한 마음으로 보냅니다.
그저 상허의 수필집 한 권이면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는 채
시간을 흘려 보낼 수 있겠습니다.

과수원 전정은 거의 마쳐 갑니다. 단호박은 수확해서 현재 후숙 중이고
하루하루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길을 헤매다 밤이 오는 그런 나날입니다.
글을 자주 못써서 이곳에 들르는 \'길벗\'님들에게 미안한 마음입니다.
자잘한 일상이라도 좀 올려야 하는데 자꾸만 게을러집니다.

김장배추와 무는 올해는 아주 잘 되었습니다. 곧 추수를 해서 예약한 곳에
나눠주고 저희도 때이른 김장을 담가야 하겠습니다. 이곳 홍천 서석은 11월 초면
된서리가 내려서 그 전에 모두 거둬들여야 합니다.

오늘 아침 저희집 마당의 온도계 수은주는 영상 5도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아침이면 복사무가 골짜기에 자욱히 깔리고 오전 10시나 되어야 골짜기가 훤해집니다.
요즘은 아침 6시에 일어나 6시 30분부터 과원에서 전정 작업 일을 시작합니다.
이슬이 축축하지만 그래도 합니다. 워낙 손이 느려 남보다 시간을 많이 소비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낮에는 손님들도 오고, 또 저도 읍내에 볼 일이 있는 날도 있어서
일을 많이 못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길벗님들, 일일일생(一日一生)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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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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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산지기 2007-10-17
    가을이 오는가 싶더니 제법 날씨가 차가워지고 있네요. 벚나무 잎새는 이미 다 떨어졌고 은행도 노랗게 익어 하나 둘씩 떨어집니다. 겨울이 멀지 않았나 봅니다. 가을걷이와 월동준비에 바쁘시겠지요. 내년에는 풍성한 수확을 이루시기를 기도합니다.
  • 길벗 2007-10-17
    감사합니다. 지척에 살면서도 이리 한번 가보지도 못하는군요.
    요즘은 정말 바쁜 날들의 연속입니다. 수확은 없어도 이리저리 월동 준비에
    뒷정리가 많습니다. 게으른 농부는 늘 이렇게 뒷북을 치게 마련인가 봅니다.
    건강하십시오.
  • 김진웅 2007-10-18
    우리나라가 넓긴 넓은가 ! 벌써 거긴 김장소리 나니...여긴 아즉 김장용 자란 배추는 제법 대접만한데 그저 풋거리 먹을 무 배추는 장지 손가락 크기나 될려나. 단감은 꼭지나방 공격받아 다 떨어졌어도 쌀, 무, 배추, 고추, 된장, 간장 넉넉히 있으니 굶을 일은 없는데 그대는 이도 안되니 우째 밥이나 먹을 수 있겠노? 휴-우-
  • 바쇼 2007-10-19
    상허 글이 주인장 글인 줄 알고 깜짝 놀랬네요, 드디어 한 문장까지 이루시는구나 싶어서요... 정말 가을이다 싶습니다, 주인장 글 읽으니... 향취가, 메마른 이곳 도시로까지 불어오는군요. 바삐 일하시는 것 같아 좋아 보이네요... 마음 같아서는 달려가고 싶지만 농번기라서 꾹 참기로 합니다. 홍천은 제게 틈만 나면 가고 싶어지는 동쪽나라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챙기는 데 게을러 그 맛있는 배추 부탁 못 드렸는데, 올해는 오미자는 맛볼 수 있기를. 혹시 생오미자를 구할 수도 있는지요? 멋쟁이 미숙 여사께도 인사 전해 주시지요. 하루하루 생생하시기를!
  • 길벗 2007-10-19
    진웅 형, 제 걱정 너무 하지는 마시구요, 한숨 소리가 예까지 들리는구먼요. ㅎㅎ
    바쇼님, 생오미자는 없습니다. 오미자는 9월 20일경부터 수확하여 곧바로 항아리에
    재워서 내년 봄에 오미자 액으로 해서 판매합니다. 혹 생오미자를 구하실려면
    내년에는 9월 중순경에 말씀을 해주세요. 그리고 시간 나실 때 언제든 홍천으로
    놀러오십시오. 저희도 사람 구경하고 대처 소식 듣는 것이 즐겁습니다. 건강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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