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이야기

농사이야기

청산에 살리라

  • 길벗
  • 2006-07-02 20:3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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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과 작업


사다리가 좀 불안합니다

어느새 장마철입니다. 요즘 장마는 옛날처럼 구질구질하게 몇날 며칠을 내리는 게 아니라 호우성으로 오는 모양입니다. 한밤중에 세찬 소나기가 여러차례 지나갑니다. 낮에도 해가 좀 나는가 싶더니 어느새 먹구름이 몰려와 한바탕 퍼붓고는 지나가고 좀 흐리다가는 다시 저녁 노을을 보여줍니다.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습니다. 요즘 세상 모습을 자연이 리플레이해서 보여주는 건지도....

어제(7월 1일)를 마지막으로 적과를 일단 끝냈습니다. 일단 끝냈다는 말은 수확할 때까지 수시로 상태가 좋지 않은 놈들은 계속 솎아낸다는 의미인데 큰 작업은 끝났다는 얘깁니다. 외부 인력을 한 사람도 쓰지않고 오로지 마누라와 둘이서만 하다보니 무려 한달이 넘게 걸렸습니다. 조그만 사과원 하나 가지고 왜그리 오래 걸리느냐고 하면 할 말이 없습니다. 낮에는 뜨거워서 못하고 아침, 저녁으로 해야 하는데 비라도 오면 공치는 날입니다. 또 어떤 날은 몸이 무거워서 마음은 굴뚝 같은데 결국 또 땡치는 날도 있습니다. 이래저래 건달 농사꾼의 농사일은 진짜 농부, 이곳 토박이들과는 비교도 안됩니다.

9자 사다리를 이번 봄에 사다가 높은 곳에 달린 사과 적과할 때 사용했는데 높은 만큼(집에 5자, 8자 짜리 사다리도 있습니다) 끝에 올라서면 아찔 합니다. 원래 약간의 고공 공포증이 있는 몸이라(게다가 몸무게도 만만치 않고) 조심 조심 올라서지만, 밭이 비탈이고 또 사과나무 가지가 방해를 해서 이리저리 안전하게 사다리를 벌리고 하기가 여간 까탈스러운 게 아닙니다. 결국 며칠 전에는 사다리 타고 적과 작업하다가 기우뚱, 큰 원을 그리며 나동그라졌습니다. 사과나무 가지가 하나 부러졌고 손목이 어디에 걸렸는지 타박상을 입었고 손바닥이 약 5센티미터 정도 찢어졌습니다. 다행히 다른 데는 다친 데가 없고 안경이 그만 날아가 어디에 쳐박혔는지 잃어버렸습니다. 풀이 무릎 만큼 자라서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적과 하다가 싫증나면 예초기 들고 나무 밑 풀을 벱니다. 이 예초기 작업은 정말 하기 싫은 일 중에 하나인데 소음이 너무 크고(2사이클 엔진이라) 매연도 많은 편입니다. 게다가 예초기 날이 달린 대를 왼손으로 잡고 이리저리 휘저어야 하는데 날 무게도 있고해서 여간 팔이 아픈게 아닙니다. 일을 끝내고 나면 팔이 한동안 저절로 덜덜덜 떨립니다. 귀는 멍하구요.

그래도 저는 나무 밑에 부직포 같은 걸 깔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있습니다. 부직포를 덮어놓으면 풀이 자라지 않으니 편하기야 말할 수 없겠지만 중요한 걸 하나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즉 풀을 키운 만큼 밭에 되돌려주는 퇴비를 스스로 제거하는 꼴이 되는 것입니다. 이 정도 양의 풀을 만약 외부에서 베다가 밭에 깔아준다고 생각하면 정말 그건 엄청난 일이 되겠습니다. 왜 그럼 사과밭에 풀을 키워야(초생재배라고들 합니다) 하느냐, 그건 저의 농사에 정신적 사부이신 오재길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러 농사책에서 초생재배법을 이미 써놓고 있지만은 그건 관리면에서 접근한 의견들이고 제가 존경하는 오재길 선생님의 말씀은 조금 다른 각도에서 풀을 말하고 있습니다(귀농을 생각하고 있는 분이라면 필히 오재길 선생님의 책을 일독하실 것을 권합니다. <새천년 맞이 생명을 위한 제언-인간 오재길의 고백과 비전> 홍익재 간. 오재길 선생님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한번 자세히 쓰도록 하겠습니다. 아마도 연재가 되어야 할 듯 합니다만.

간략히 쓰면 오 선생님은 사과 농사에 축분도 쓰지 마라, 오직 퇴비만 해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 선생님은 사과 농사를 지으신 분은 아니시지만 40년이 넘게 농사만(그중에서 30년을 유기농업으로만 하신 분입니다) 지으셨으니 작목을 불문하고 대원칙에 충실한 분입니다.
저는 현재 집에서 키우는 한우 분뇨를 참나무 수피와 섞어 놓았다가 밭에 내고 있습니다만, 아무튼 풀만 가지고 농사를 지으라는 선생님의 말씀을 언젠가는 실천해보고 싶기도 합니다(현재 저의 상황으로는 도무지 실현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 우리집 사과맛이 다른 집과 다르고 또 맛있다면 그건 바로 풀 때문일 것입니다.

어제 오늘은 비가 와도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적과 일이 느려터지니 짜증도 나고 이제 그만 끝내고 좀 쉬고 싶어졌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비가 자주 오니 풀은 하루가 다르게 자라고 그걸 예초하려니 날 좋은 날만 기다릴 수 없어서 비가와도 적과하고 또 예초하고 했습니다. 오늘은 오후에 비가 또 오길래 잽싸게 그간 기회만 보고 있었던 CPK 살포를 밭에 했습니다. CPK는 천보 효소, 과린산석회, 염화가리, 쌀겨를 잘 버무린 것으로 유기농업에서 사용하는 자재입니다. 당도를 높여주고 웃자라는 것을 막아주는 등 여러가지 작용을 합니다. 작년 가을에 아버님과 뜨거운 가을 볕 아래서 하루 종일 섞고 비벼서 비료 포대에 넣고 밀봉해둔 것을 이제사 사용하는 것입니다. 작년 가을에 2톤 가량을 준비해놨으니 내후년 까지는 넉넉히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CPK는 꼭 비오는 날에만 뿌려야하기 때문에 오늘 오후 비를 흠뻑 맞아 가면서 온밭에 뿌렸습니다. 나무당 3-4주먹씩 줍니다. 밭이 비탈이니 오르락내리락하면서 풀이 미끄러워 넘어지기도 여러번 했습니다. 그러다가 생각난 게 \'어이구,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뭔 황금사과를 얻으려고 이 짓인가\'하고 좀 한탄을 했습니다. 그러나 생각도 잠시, 농사일 만큼은 참 즐겁습니다. 일을 마치고 들어오려는데 비를 맞아 후줄그레한 모습을 본 안사람이 웃었습니다. 때로 힘들고 짜증이 나다가도 그러나 곧 잊습니다. 단순한 농사일이 참 즐겁고, 또 땀 흘린 뒤에 샤워할 때의 상쾌함은 맛본 사람만이 느끼는 쾌감이겠지요? 인간이 쾌락의 동물이라면(에피쿠로스는 쾌락은 행복한 삶을 형성하는 알파요, 오메가라고 했습니다) 농사건 어떤 일이건 그것에서 순수한 쾌락을 얻는다면 좋은 일이겠습니다.

에피쿠로스를 떠올리니까 갑자기 생각난건데, 언젠가 선배 한 분이 굳이 나눈다면 자기는 스토아와 에피쿠로스 중에서 에피쿠로스적 삶이라고 한 적이 있는데(물론 술자리에서 가볍게 지껄이던 말입니다만) 그러고보니 저도 이제는 그렇다고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한때는 참 거대담론에 갇혀 좀 공허한 세계에서 맴돌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우리의 삶을 갉아먹은 것도 같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에피쿠로스적인 삶, 즉 작은 일에 만족하고 거기서 기쁨을 찾는 삶을 찾아 가는 것 같습니다. 물론 제가 \'길벗농당\'에서 얼마 전 쓴 글에서처럼 아직도 \'때\'를 벗지 못해 가끔 흥분하기는 하지만요. ㅎㅎ

\"그러니까 에피쿠로스적 정신의 소유자들은 내 힘으로는 어찌할 수도 없는 사회를 포기하고 내가 직접 다스릴 수 있는 나의 사적인 영역 속에서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려 합니다. 즉 이들은 내가 어쩔 수 없는 거창한 일을 가지고 동분서주하기보다는, 작고 보잘것없는 일이라 하더라도 내가 확실하게 관리할 수 있는 소박한 일에서 삶의 기쁨과 보람을 찾으려 하는 것입니다.\"  -김상봉 교수의 <호모 에피쿠스> pp140에서 인용-

오늘 이 글의 제목을 \'청산에 살리라\'라고 했습니다. 김연준 작사, 작곡의 가곡을 떠올리며 붙였습니다. 올봄부터 제가 자주 듣게 되는 곡입니다. 이 게시판에 링크를 걸어놓아 곡을 들을 수 있도록 해보겠습니다.

\'나는 수풀 우거진 청산에 살리라 나의 마음 푸르러 청산에 살리라  이 봄도 산허리엔 초록빛 물들었네 세상 번뇌 시름 잊고 청산에 살리라 길고 긴 세월 동안 온갖 세상 변하였어도 청산은 의구하니 청산에 살리라\'

장마비가 오락가락합니다. \'세상 번뇌 시름 잊고\' 정말 청산에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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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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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경렬 2006-07-06
    늘 맛있고 좋은 사과를 열매 맺기위해 애쓰시는 선생님 가족을 보며 부끄럽다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사과 꽃 필 때 가서 꽃따는 일도 거들고 싶었고 사과 적과하는 일도 돕고 싶었는데 마음뿐이 되었네요 이러다 사과 딸때 나 가게 되겠네요
  • 길벗 2006-07-07
    사과 딸 때는 꼭 와서 아이와 함께 많이 따가기를 바랍니다. 작년에 회사 후배가 유치원에 다니는 딸 둘과 와서 직접 사과를 따 갔는데 아직도 그 얘기를 한다고 합니다. 뭐든지 수확의 기쁨은 무엇과 비교할 수 없이 큰 체험이지요. 건강하지요? 안그래도 다른 일로 전화 할 일이 있었는데 목소리나 들어봅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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