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이야기

농사이야기

지나간 이야기들-여섯번째

  • 길벗
  • 2004-10-02 12:5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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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4월, 드디어 이사를 와서 짐을 풀고, 짐을 풀기가 바쁘게 그해 봄 농사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애초에 나를 받아준 그 집과의 약속이 유기농 농사였고 특히 잡곡류만 심기로 했기에 그건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5천 평 밭을 구획하여 그 집 내외와 우리는 고추, 콩, 기장, 수수, 팥을 심기로 했습니다.
밭흙 뒤집기는 동네 사람이 트랙터를 몰고 와서 값을 치르고 해주었습니다.

그 해 봄은 십 몇 년 만에 본다는 심한 가뭄이 왔습니다. 콩을 심어도 싹이 나오질 않았습니다. 냇가에서
물을 끌어다 간이 스프링쿨러를 밭에 돌리고 어떤 것은 씨를 두번 뿌리기도 했습니다. 고추는 두 집이
먹을 만큼만 심었는데 밑에 검은 비닐을 씌우고 정식을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나머지는 모두 맨손으로
제초 작업을 해야만 했습니다. 말 그대로 옛날 방식 그대로 밭 고랑에 쪼그리고 앉아 호미로 일일이
김을 맸습니다. 콩밭은 한여름이 오기 전까지 무려 세 번이나 매는 수고가 뒤따랐습니다. 기장밭이
천 평 정도 되었는데 그 밭은 '풀밀어'(전농회 부회장인 김준권 씨가 고안하여 양평의 유정란 씨가
판매하고 있는 제초기. 바퀴와 날이 달렸고 전적으로 사람의 힘으로 밀어서 밭고랑의 풀을 제거하는
간단한 기계)를 구입하여 제초 작업을 하였습니다.

6월 말 쯤 오른손 등이 퉁퉁 부어 올랐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주먹이 쥐어지질 않았습니다.
계속 오른 손에 호미를 잡고 일을 한 때문이었습니다. 몸무게도 석 달 사이에 8킬로그램 정도
빠졌습니다. 도시에서 워낙 몸이 불어 있던 터라 별 일은 아니라고 생각은 했지만 주위에서 자꾸
병원에 한번 가보라고 해서 원주에 진찰차 나간 적도 있었습니다.

그때는 이 농사를 지어서 무슨 작물에서 얼마가 나온다는 계산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저 경험이려니 했고 차차 알게 되겠지 하는 마음 뿐이었습니다. 첫 해는 어차피 마이너스
가계를 예상하고 갔었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가 조그만 점포를 하나 열어도 손익분기점이란 게
있지 않습니까. 그때까지는 계속 투자만 되는 셈이지요. 저는 농사도 그와 같다고 생각하고
너무 조급하게 생각지 말자고 했습니다.

이렇게 계획하고 귀농 첫 해를 보내니 마음은 편했습니다. 그러면서 몇 달 지나니 차츰 주위 풍경도
들어오고 마을 사람들과 안면도 트여 좀 친한 사람도 생기게 되고 그네들의 농사 짓는 기술이며
살아가는 속내가 조금씩 조금씩 눈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강원도 홍천은 여름 오이와 애호박이 소위 특작물이었습니다. 재배 역사는 길지 않으나 특별한
소득 거리가 없는 강원도 지역에서 한여름 오이와 애호박은 농민들이 현금을 만지게 해주는 효자 작물
이었습니다. 특히 오이가 그랬습니다. 그런데 오이는 재배하기가 쉽지 않은 작물입니다.
그래서 오이 농사 기술을 배울 겸 해서 우리 집 지을 때 도와준 인연으로 알게 된 철민 아빠(이이는 99년에 귀농한 사람입니다)네 오이 하우스에 가서 7월 한 달 내내 우리 부부가 일 좀 했습니다. 일당도 없이
그저 배운다는 마음으로 매일 출퇴근 하다시피 했습니다.

한 여름 하우스 오이 농사는 생각보다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쉬엄쉬엄 철민 아빠의 친절한
가르침 속에서 하루하루 재미가 있었습니다. 우리 부부는 먼저 귀농해 터 잡아 놓은 철민네 덕분에
좋은 농사 체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애초 계획했던 2년은 커녕 1년도 안되어 새로 터를 잡아 나가야만 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함께 농사를 짓자고 해서 내려왔던 그 오천 평 땅주인과 우리와 의견 다툼이 생긴 것입니다.
애초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그 사람은 농사 경험도 일천했고 더구나 자신은 직접 농사를 짓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집 부인과 우리 부부 이렇게 셋이서만 땡볕에 앉아 온종일 밭일과
씨름하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결국 아이들 교육 문제에 대한 이견까지 겹치면서 온지는 얼마되지
않았지만 더이상 함께 농사를 짓고 서로 돕고 살 수 있는 상황이 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당황스런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좌절감과 낭패감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나와 안사람이
잘못한 것이 없고 우리 아이들이 시골 생활에 만족하고 있기에 저는 가장으로서 용기를 냈습니다.
살면서 시행착오도 있는 법이라고 자위하고 새로운 터를 찾아 나섰습니다. 어차피 잘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어쨌든 저로서는 당시 심리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모든 상황을 곁에서 보고
아는 철민이 아빠,엄마와 이곳에 먼저 내려온 귀농 선배이자 대학 선배인 완규 형이 위로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해 즉 2001년 8월에 인근 여러 곳에 나와 있는 농지를 두루 보러 다녔습니다.

몇군데 보고난 뒤에 지금의 이 터를 결정했습니다. 행정구역으로는 먼저 살던 내촌면과 달리 서석면
이었지만 바로 옆 동네나 다름 없는 이웃한 곳이었습니다. 9월 초순 경 땅 값을 치르고 다시 집 짓는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땅은 대지를 포함하여 3천 5백 평이었고, 골짜기에 안온하게 둘러싸인
곳이었습니다. 남들은 일생에 한번 집을 지을까말까 한다는 데 저는 일년에 두번 자기 집을 짓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먼저번은 남의 땅에 허름한 비닐 하우스 집이었으나 이제는 오래도록
살 집이라 제대로 짓고 싶었습니다.

귀농 첫 해, 말도 많고 고민도 많고, 가슴앓이도 많이 한 시간이 이렇게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이때의 저의 생각과 사는 모습을 한겨레 신문에 연재를 했었습니다. 그 신문의 권태선 부국장님이
강권하여 쓰게 된 것인데 어줍잖은 글입니다.
지나간 이야기-일곱번째 꼭지에 그 글 중 몇 편을 옮겨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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