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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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전한 10월 그리고...

  • 길벗
  • 2020-10-11 16:5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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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시드르를 만들기 위해 이번 가을 3톤 발효탱크 두 개와 1톤 발효탱크 두 개를 구입했다. 앞으로 이 탱크들이 5톤, 10톤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애플시드르를 제조하기 위해 거기에 맞는 새로운 품종 250주를 내년 봄에 심기 위해 엊그제 와야리 부사 사과밭 일부를 정리했다. 겨울이 오기 전에 지주를 박고 관수 시설을 해놓아야 한다. 사과술을 위한 전용 품종이 무엇인지는 아직 비밀이다.

20년 사과농사에 처음 추석사과를 한 박스도 내지 못하고 지나가니 그 허전함과 실망을 말로 다 할 수 없다. 나의 고집(껍질째 먹는 사과)을 고지식하게 지키려다 이렇게 된 결과라 누구를 원망할 수도 탓할 수도 없다. 그저 자연은 천지불인이니 어쩌겠는가.

사람이 사는 한 평생에 굴곡이 있게 마련이겠지만 올해는 소소한 시련의 연속이다.
그런데 그 원인이 모두 기후와 자연에 달려 있는 셈. 코로나로 동남아 외국인의
출입이 제한되어 올해 농촌에서는 일손 부족이 심각하였다. 더하여 겪어보지 못한 긴 장마.

어떠한 일이 닦처도 그러나 사람은 살아간다. 전쟁 통에도 아이들은 태어나고 큰 고개를 넘으면 내가 흐르고 바람이 지나면 비가 오는 것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근력과 용기는 쇠퇴하는데 그러나 참아내는 습관은 점점 더 붙는 것 같다.

이번 가을 두 달 사이 마음 고생이 심했던지 몸무게가 5kg이나 빠졌다. 보는 사람마다
살이 빠졌다고 한다. 사실 그동안은 좀 과체중이었다. 적정한 몸무게를 유지하려면
아직 5kg이 더 빠져야 한다.

그동안 농사만 지을 때는 몸은 고되도 마음은 편했다. 그런데 식품제조업을 그것도
구멍가게 수준으로 하는데도 신경 쓸 데가 한 두 군데가 아니다. 생각지도 못했다.
이렇게 규제와 기준이 까다로운 줄은. 그러니 소규모 제조업은 그저 창업도 운영도
어렵기만 한 것 같다. 정부가 소상공인이라고 명명하여 이런저런 지원과 대책을
운운하지만 특히 식품에 대한 까다로운 규정과 절차는 나같이 1인 혹은 가족이
운영하는 소규모업체는 그야말로 신경이 곤두선다.

연초부터 사업 따오느라고 너무 많은 신경과 스트레스를 받았고 막상 사업 수주를
한 것은 좋은데 이후 진행되는 관급공사 일을 겪어보니 참 세상살기가 만만찮다.
그저 촌에서 1차 농업이나 하고 살면 그야말로 천하태평인 것을 이제사 알게 되었다.

오래 전에 우연히 읽은 기사에서 who 사무총장을 엮임한 이종욱 박사의 삶은 내게
큰 감동을 주었는데 그 분이 자신의 삶에 대해 \'Nobody\'라 칭한 것이 아주 인상적이었고
나 역시 늘 이름없는 돌맹이로 사는 것에 자족하자는 생각을 평소 해왔던 터였다.

그러나 그 분의 열정과 능력은 너무나 크고 고귀해서 나같은 시정잡배가 감히 곁에
붙일 수도 없으나 그러나 이후 나는 자주 nobody를 나의 삶의 모토로 생각을 떠올리기도
했다. 20년 전 시골로 올때도 무슨 큰 계획이 있거나 할 일을 두고 온 것이 아니다.
그저 사람들과 부대끼며 사는 것보다 조용히 농사 짓고 사는 직업이 좋아서 온 것이다.

그러니 이곳에 와서 20년을 살아도 이 지역에 흔한 무슨 모임, 계, 단체에 한번도
얼굴을 내민 적이 없다. 그저 골짜기에서 살 수 있는 한 혼자 살았다. 마을에 경조사야
이웃이니 가보기도 하고 부조도 하지만 결코 범위를 넘어 지역에서 나서지 않았다.

이제 이곳에 온지도 20년, 나이는 쉰 여덞이다. 내가 태어나 고향을 포함 한 곳에서
가장 오래 산 터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 그간 농사만 짓다가 여전히 사과농사는 계속하지만 조그만 가공업체를 시작했고(재작년 사과식초) 더하여 이제 사과즙 가공과 애플시드르(양조장)까지 생산하게 된 것이다.

앞으로 내가 이곳에서 사는 한 애플시드르 제조에 나의 남은 시간과 정열을 다 들이부으려고 한다. 물론 사과농사는 은퇴하는 날까지 계속 할 것이다. 본격 와이너리는 직접 농사지은 포도로 와인을 제조하여 자기 브랜드로 판매까지 하는 것이다. 이제 나도 이 나이에 그 대열에 끼게 된 것이다. 와이너리에 대비하여 사과(애플시드르)는 사이더리(cidery)라고도 한다. 미국에서는 사이더하우스(cider house)라고 명명하기도 하고.

요즘 매일 틈나는대로 아마존에서 킨들로 구입한 사이더 책을 노트북으로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다. 그야말로 책으로만 공부해서 술을 만드는(즉 공장에서 인부로 경함한 적이 없는 맹탕이) 사람이 되는 것인가 하고 스스로 부끄러워 웃을 때도 있지만 아무튼 이 나이에 안돌아가는 머리를 쥐어짜내며 영어책을 매일 읽고 있다. 한 가지 다행한 것은 그나마 지난 2년간 사과식초 제조를 위해 사과술을 만들어본 경험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 사과식초를 위한 사과술과 마시기 위한 사과술의 차원은 아주 다른 것이지만.

새로운 사업을 하면서 부딛치는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자금이다. 그간 뉴스에서나 기업체(대중소기업을 가릴 것 없이)가 운전자금, 시설자금 운운하는 것을 아무런 감각이 없이 지나쳤는데 막상 내 일로 닥치니 그것이 아주 어렵고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실감한다.

그리고 존경하는 영준 형이 사업가는 원래 돈 빌리는 사람과 동의어라는 농담에 웃어넘겼지만 참 가슴을 찌르는 말이 아닐 수 없다. 기술과 자본 그리고 마케팅 이 모두를 아울러야 하는 사업하는 사람(규모를 떠나).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이니 그저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면 가장 잘 사는 하루 인생이라는 것을 매일 경험하면서 이제는 부족한 체력, 지력을 애써 동원해서 하루하루 버텨나간다.

이곳에 오셔서 이 조그만 농장을 관심있게 돌보아 주시는 길벗 님들에게 늘 감사드리면서 또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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