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당길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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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에 실린 우리집 사과 이야기

  • 길벗
  • 2006-05-10 06:5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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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 832호(2005년 10월)에 성석재 씨가 쓴 우리집 사과 이야기를 이곳에 전재해 올립니다. 성석재 형의 과분한 기대와 칭찬을 받을만 한지 송구스럽습니다만 앞으로 더욱 잘 하라는 당부로 알고 더 열심히 \'맛있고 안전한\' 사과 만들기에 노력하겠습니다>


바보 농부와 껍질째 먹는 사과  


성석제(소설가)


사과는 맛있다. 그건 기차가 긴 것과 마찬가지로 분명한 사실이다. 나의 경우 사과의 맛은 사과를 깨물 때 결정된다. 정말 맛있는 사과는 입아귀를 다 아프게 만든다. 입 속의 모든 기관이 저 먼저 맛보겠다고 설쳐대는 것 같다. 먼저 달콤한 향기가 소리 없이 공습하고 신맛이 어금니 뿌리 근처의 신경을 가격한다. 씹을 때의 와그작와그작 하는 소리도 다른 과일에서는 듣기 힘든 상쾌한 소리다. 여기에 더하여 한겨울 밤에 차디찬 사과를 깨물 때의 그 느낌을 맛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고, 손에 쏙 들어올 만큼 자그마한 사과를 외국에서 맛보았을 때 갑자기 느껴지던 향수를 맛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를테면 캄보디아의 시엠립에서 프놈펜으로 가는 쌍발기, 에어컨이 없어 드라이아이스에서 나오는 희뿌연 냉기를 선풍기로 부쳐주던 그 비행기 안에서 여승무원이 나눠주던 자그마한 사과 같은 것, 그것을 쥐었을 때의 감촉 그 자체를 맛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데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대학에 진학하면서 서울로 온 이후 20년 이상을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며 살다가 강원도 홍천으로 귀농한 친구가 있다. 강원도 출신이긴 해도 홍천은 그와는 아무런 연고가 없는 곳이다. 밭 3천5백여 평을 사고 침목을 사다가 집을 짓느라 바쁜가 싶더니 심사숙고한 끝에 사과 농사를 짓기로 결정을 했다. 한우를 키우기도 하는데, 축산을 전문으로 하려는 게 아니라 사과 농사에 필요한 거름에 가축의 배설물이 절대적으로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땅과 거름, 생명의 힘을 믿었다

그가 사과 농사를 짓겠다고 하자 이웃 농부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농사 기술을 가르치는 기관이 홍천읍에도 있는데 그 기관의 직원들도 고개를 가로젓기는 마찬가지라고 했다. 홍천에서는 누구도 사과 농사를 지은 적이 없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당연히 가까운 곳에 농사 기술을 배울 사람이 없었고, 사과 농사에 맞는 비료며 농약이며 자재를 구하려면 사과 주산지에 가야 했다. 그가 믿었던 것은 ‘홍천도 사과 농사를 지으면 잘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어느 사과 전문가가 했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는 땅과 거름의 힘을 믿었다. 최종적으로, 결정적으로 그는 생명의 힘을 믿었다.

홍천군 서석면하고도 수하리의 골짜기에 있는 그의 집은 한겨울에 가장 추울 때는 영하 30도를 오르내린다. 보통 사과나무가 자연 상태에서 견딜 수 있는 온도의 한계가 영하 30도쯤이라고 한다. 사과나무를 가져다 심었던 첫해 새파랗게 얼어붙은 어린 가지들을 나도 본 적이 있다. 그때 그의 침목집 벽에 걸린 온도계는 영하 25도였다. 그 불쌍한 어린 나무들을 위해 군불을 때주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짚이나 보온재로 싸줄 만도 하건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니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어릴 때부터 그런 추위를 견디면서, 적응하면서 살아 남는 사과나무가 그가 원하는 사과나무였다.

“사과나무는 원래 20, 30년까지도 충분히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그런데 어릴 때부터 화학 비료와 농약을 퍼부어가며 오로지 사과 열매를 맺는 노예로 키워서 착취를 하면 15년도 견디지 못하고 나무 속이 텅 비어버린다. 나는 그런 식으로 나무를 키우지 않겠다. 나는 20년이고 30년이고 건강한 사과나무와 같이 살고 싶다. 나는 사과를 정말 좋아하고 사과나무를 사랑한다.”

생명의 힘은 얼마나 놀라운지 그 집 사과나무 6백 그루는 모진 겨울, 사자 애비 같은 주인을 만나고도 잘 견뎌주고 잘 자라서 이제 4년째가 되었다. 작년에 맛보기로 서너 상자를 수확했고 올해 상업적으로는 첫 번째 수확을 한다. 그는 힘들게 일일이 풀을 베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사과나무 하부에까지 풀을 키우는 방식(초생재배) 농법을 채택하고 있고, 거름도 집에서 기른 한우의 우분과 참나무 수피를 섞어서 1년간 발효시킨 퇴비만을 썼다. 또 최대한 농약을 적게 쓰고 화학 비료를 일절 쓰지 않아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이름도 기차처럼 길다)으로부터 친환경 인증을 받았다.

9월 첫 주에 그의 농장 뜰에서 올해 첫 번째로 수확한 사과, 입 안을 환희에 젖게 하는 그 사과를 껍질째 먹었다. 100m 달리기를 하는 것처럼 한 번도 쉬지 않고.

그 사과는 크지 않았다. 사과를 크게 만들기 위해 농부들은 비대제 같은 생장조절물질(호르몬제)을 사과에 치는 것도 불사한다. 비대제는 정부와 농약업체가 인정하는 허용치가 있는데, 그 허용치 안에서 약을 치면 시판이 허용된다. 우리 나라 소비자들이 크기를 중시하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 시장에서 값을 후하게 받을 수 있다. 이러니 농부들이 크기에 목숨을 걸다시피 한다.

그 사과는 색깔이 반만 빨갛고 나머지는 노랗고 연초록이고 제멋대로였다. 바닥에 반사필름을 깔고 햇빛을 가리는 쪽의 잎을 따주고 익지 않은 부분을 햇빛 드는 쪽으로 돌려주는 식으로 농부들은 색깔을 내기 위해 노력하고 심지어 착색제까지 친다. 역시 우리 나라 소비자들이 과정이야 어떻든 색깔이 예쁜 사과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 사과는 겉에 흠집이 있었다. 수확하기 한 달 전에 마지막으로 살균제를 쳤는데 그 이후에 서너 차례 강한 비가 오는 바람에 약성분이 다 달아나 겉모양이 울퉁불퉁 못생기게 되었고 얼굴에 버짐 핀 소년처럼 얼룩이 진 것도 있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농업기술센터에서 사과 농사를 지을 때 기본적으로 농약을 치는 횟수로 열두 번을 권장하고 있었다. 농촌진흥청 원예연구소 사과시험장에서는 “농약은 농산물 증산과 질적 향상의 필수 수단이며 실제로 사과 재배의 경우 농약을 사용하지 않고는 단 한 개의 과실도 수확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라고 말한다. 아아, 단 한 개도라니?

사과 농사를 지으면서 농약을 안 친다는 건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다. 그의 농장은 해발 5백여 m 높은 곳에 있고 겨울이 길고 추워서 벌레와 균이 적은 편이다. 그의 목표는 농약 치는 회수를 8회 이하로 줄이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그의 농장에서 나오는 사과는 작고 색깔도 좋지 않고 못생기기까지 했다.  

그는 사과를 시장에 내다 파는 걸 포기했다

중요한 건 그 사과가 껍질째 먹을 수 있는 사과라는 점이다. 사과 껍질에는 키틴·안토시아닌·케르세틴·옥타코사놀·폴리페놀에 풍부한 섬유질이 있다. 특히 폴리페놀은 노화와 암을 예방하고 근력을 증강시키고 내장 지방을 제거하는 다양한 효과가 있다고 한다. 이 중 어느 하나만 효과가 있다고 해도 사람들이 벌떼처럼 달려들 판인데 어쩐지 아직은 반응이 미지근한 것 같다. 껍질을 먹지 않아서, 먹지 못해서 그런 것인가.

언젠가 생물학을 전공하는 어느 교수로부터 ‘잔류 농약 무서워서 사과의 껍질을 깎아 먹느니 농약을 먹더라도 껍질째 먹는 게 낫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 때부터 어지간하면 사과를 씻어서 먹으려고 했지만 때깔 좋고 큰 사과를 먹을 때는 불안해서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농약의 양이며 사용 기한을 제대로 지키는지, 새롭게 나오는 호르몬제의 영향을 속속들이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홍천에서 사과나무 용사들을 독하게 키우고 있는 어리석은 농부는 못난이 사과를 시장에 내다 파는 걸 포기했다. 당장은 아는 사람들끼리 나눠서 먹어주고 있지만 본격 수확이 시작되는 내년부터는 무슨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사과는 맛있다. 건강한 사과나무에 달린 사과를 따서 옷에 쓱쓱 문지른 뒤 껍질째 먹으면 정말 맛있다.  


시사저널 [8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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