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당길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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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설치고는 많은 눈이 왔습니다

  • 길벗
  • 2006-03-30 09:4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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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밤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이 아침에 일어나보니
10cm 이상 쌓였습니다.
해가 나자마자 금새 녹기 시작합니다만, 아무튼 많이 왔습니다.

춘래불사춘이라더니 지난 주엔 제법 따스한 봄볕을 나누어주더니
이번 주엔 내내 바람 불고 싸늘하다가 결국 큰 눈을 뿌리고 가는군요.
이번 주 초 서울에 갔더니 벌써 개나리들이 노란 꽃을 사이사이
피우고 있더군요.
이곳에서는 산수유가 조금 벌어지는 정도, 개나리는 꿈쩍도 않고
있습니다.

풀무 학부모 게시판이랑 까페에 성석재 형이 시사저널에 쓴
우리집 사과 이야기를 황금성 회장님이 올려놓으셔서
제가 괜히 몸둘 바를 모르게 되었습니다.
제가 무슨 진정한 농사의 용사라도 되는 양 조금은 과장되게
쓴 부분도 없지않은 터라 그렇습니다.

농사에 대한 꿈은 오래 되었지만 그렇다고 제가 무슨 '운동' 차원에서
귀농한 것도 아니고 모임에서도 말씀드렸지만 그저 도시 생활이 싫고
조직 생활이 싫증나서 돌아온 것 뿐입니다.
또 환경과 생태에 대한 저의 인식도 그저 평균보다 조금 더 관심이
많은 평범한 중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 같습니다.
농촌과 농업에 대한 인식도 과학적이라기 보다는 감성적으로 접근하는 게
저의 수준이고 보면 참 부족한 게 많은 것이 길벗농장입니다.

소위 저는 386이라 불리는 세대지요. 현재 한국에 사는 모든 연령층은
나름대로 모두 고생한 세대라 불려도 무방하다고 봅니다만, 저희 386 역시
초등학교 때는 콩나물 교실(2부제 수업 또는 한반에 70-80명)에서, 고등학교
입시와 치열한 대입 경쟁을 치렀고, 특히 대학에 와서는 전두환 군사 정권
하에서 대학생활을 시작해야 하는 비운의 세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80년대는 모두 '운동'의 차원이 아니었나 회상됩니다.
그러다보니 삶에 대해 조금은 전투적인 자세, 조금은 시니컬한 인식이
있다고 봅니다. 그 운동 에너지가 90년대 이후(그러니까 구 소련 붕괴 이후)
정치적인 투쟁 일변도에서 벗어나 다양한 분야로 뻗어(?) 나갔다고
보여집니다.
제가 겪은 바로는 90년대 중반부터 환경과 생태, 대안교육, 인권 등의
분야에서 소위 이 386들의(그러니까 대학 때 '운동'했다는 이들) 얼굴이
보이기 시작하더군요.
뭐든지 '운동'으로 하지 않으면 안되는 우리 386들이 참 에너지도 넘치고
적극적이라고 살면서 여러 곳에서 보고 느끼곤 했습니다.

이제 40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그때 그 시절 친구들이 참으로 다양한
방면에서 제 자리를 잡아가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저는 서점, 고등학교
교사, 출판사, 대기업 사원, 학원강사 등으로 연신 직장을 바꿔가며
침잠되지 않는 저 자신을 부단히 괴롭히며 굴러다녔는데요(구르는 돌은 이끼가 끼지 않는다고 했던가요) 이제사 그 방황끼가 조금 가시고 돌아와
거울 앞에 앉은 누이처럼 이 강원도 궁벽진 산골짜기에 틀혀박혀
살게 되었습니다.

농사일이 재밋고 이곳에 사는 제 자신이 참 편안하다고 많이 느낍니다.
정말 이제야 제가 평생 짊어지고 갈 직업 하나를 만났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자연과 생명에 대해 무관심했던 제가 다시 이 근본적 물음에 대해 그나마
관심을 갖게 되고 노력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 참 다행이라고 여겨집니다.
왜 진작 20대에 들어오지 못했을까 하는 쓸데없는 후회도 하지만 그러나
다 사람마다 자기 때가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알 것 같습니다.
그 때를 채워야 비로소 이 우주 속에서 각자 제 구실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어줍잖은 깨달음도 떠올려봅니다.

저는 많이 어리석고 모자라서 늦게사 저의 자리를 잡아가는 중이지만
그래서 저의 두 아들은 쓸데없는 방황의 시간을 줄이라고 풀무에 보냈습니다.
현이 말처럼 풀무에서 담금질을 당해서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어제 밤에는 문득 오래 전에 가보았던 두레마을 길가에 걸려있던 현판 글이
생각났습니다. '사람아,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때를 기억하라.'
정말이지 흙으로 돌아가는 때가 부자든 가난한 자든, 지식인이든 무지렁뱅이든 모두에게 똑같이 온다는 사실이 참 은혜스러웠습니다.

봄눈이 많이 온 날 아침에 눈 소식 전하다가 이런 계획에도 없던 얘기를
주저리주저리 하게 되었습니다.
(갤러리에 눈 내린 농장 풍경 올려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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