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이야기

농사이야기

한 해를 보내며

  • 길벗
  • 2020-12-23 07:4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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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 준공을 12월 8일에 하고 나서 다시 허가를 내어 공장 옆에 보일러실과 창고 용도로 증축을 하고 있습니다.


공장 내부 사과주스 파우치 기계 설치 모습입니다. 이번에 이런 사과주스 파우치 외에 페트나 병에도 사과주스를 담아 보려고 여러 업체를 만나고 조사를 했으나 이런 조그만 식품가공기계를 놓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비용이 많이 드는 것인지 알게 되어 놀랐습니다. 결국 이번 사업에서는 설치 포기.

올해로 귀농 20년, 낯 설고 물 설은 이곳 홍천에 와서 이 골짜기에서 그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 사이 초등학생이던 아이들은 다 커서 제 갈 길로 갔고 남한에 땅 한 뼘 없이 이북 따라지로 사시던 아버님도 저희와 같이 이 골짜기에서 마지막 생을 사셨습니다.

돌이켜보면 참 오랜 시간인데 한 순간인 것도 같습니다.
3천 평 좁은 골짜기에서 20년을 한 집에서 살았습니다. 토박이들은 이런 골짜기가 무섭고 싫다고 또 불편하다고 모두 큰 길가로 옮겨 가서 사는 덕분에 이런 골짜기는 우리 차지가 되었습니다.

다행한 것은 모두들 무섭지 않느냐고 하는 이 골짜기의 생활을 안사람이 전혀 무서워하지 않고 오히려 조용하고 남의 간섭을 받지 않아서 좋다고 하는 것입니다. 며칠 전 눈이 많이 왔습니다. 뒤이어 영하 20도의 날씨가 이삼일 내리쳤습니다.

보일러실의 온수 배관이 살짝 얼고 첫눈 치고는 12~3센티미터나 내린 많은 눈을 쓰느라 이틀을 꼬박 허비했습니다. 겨울이 온 것입니다. 농부는 겨울이 농한기입니다. 봄부터 가을까지 무진 애를 쓰고 땀을 많이 흘렸으니 자연의 이치따라 겨울엔 쉼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건 오랜 인류의 순환일 뿐 요즘은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다행히 강원도 농부들은 겨울이 너무 추워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온전히 농한기를 즐깁니다. 저도 그간은 그렇게 살아왔는데 이제부터는 겨울에도 바쁘게 생겼습니다.

사과농사만 짓다가 작년부터 사과식초를 가공하고 올해는 사과주스(사과즙) 공장을 지어 이제는 겨울에 사과주스 가공작업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더하여 굳이 용기를 내어 도전하고 있는 사과술(애플사이더. 프랑스에서는 애플시드르)도 사과 수확 후 겨울에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유튜브에서 외국의 와이너리와 사이더리(cidery. 와이너리처럼 사과 과수원을 하면서 사과술 가공을 하는 곳을 이렇게 부릅니다)를 많이 보게 됩니다. 사과(포도) 농사를 짓고 이를 겨울에 가공하여 내는 것입니다. 제가 작년 2월에 프랑스 노르망디와 파리 동쪽에 있는 사과 과수원(모두 애플시드르와 사과식초를 하고 있는) 두 곳을 방문하고 그네들의 가공장비와 방식을 구경하고 온 적이 있습니다.

다행히 많은 내돈을 쓰고 다녀온 그곳에서 보고 들은 것이 큰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아마존에서 책을 여러 권 사서 읽고 있습니다. 그래도 경험도 없이 이 일을 하는 것은 앞으로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올해는 처음 겪는 사과 흉작이었습니다. 50일 넘는 긴 장마에 저의 농사 방식으로는 견딜 수가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껍질째 먹는 사과-이 모토를 처음 이 농사를 시작할 때부터 지켜왔는데 날씨에 따라 상황에 따라 나의 농사 기본을 바꿀 수는 없었던 것인데 그만 어쩌는 수가 없었습니다.

노지에서의 농사는 그래서 하늘과 사람이 반반 짓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농사는 큰 실패로 돌아갔고 더하여 올해 가공공장(사과주스와 사과술) 짓는다고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바쁘고 피곤한 해였습니다.

혼자서 하는 일이라 더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다 큰 아들들 가운데 하나가 어서 들어와 같이 이 농사를 이어갔으면 하는 바람인데 아직 때가 아닌 모양입니다. 큰 애는 전문적인 분야에 취직이 되어 앞으로 자격증과 경력을 더 쌓기를 바라고 있고 둘째는 독일에서 다시 대학원에 진학해서 2년은 더 있어야 공부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이북에서 내려와 남한에서 한 곳에 자리잡지 못하고 부평초처럼 이리저리 떠다니며 가족을 챙겼던 선대를 보며 저는 가업을 자손에게 물려주는 것이 참 훌륭하고 또 귀하다는 생각을 젊어서 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런 자본도 기술도 없는 저같은 이에게 그래서 농사는 쉽게 다가왔고 일찌기 결심하여 내려온 것입니다. 물론 도시에서의 저의 소비적인 삶에 대한 피로감이 더는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연말이라 이런저런 상념이 많이 스쳐갑니다. 이 홈페이지를 15년 전인 2004년에 만들어 올렸는데 그간 한 업체에서 계속 관리해왔습니다. 이번에 PC와 모바일 모두 볼 수 있는 반응형 홈페이지로 바꾸려고 현재 작업 중입니다. 그간 우리 홈피를 만들어주고 관리해준 앞선디자인 사장님 내외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시간은 끝없는 것이라 시작과 끝이 없지만 인간은 한 해를 두고 계속 처음과 마지막을 얘기합니다. 그리고 사실 우리에게 말(언어)이 있다는 것이 굉장한 축복입니다. 그래서 무한한 시간 속에서 유한한 사람의 말로 이렇게 소식을 전해주고 또 뜻을 주고받는다는 것이 살아있다는, 숨을 쉰다는 증표같은 것이겠습니다.

이곳에 오시는 모든 길벗 님들에게 늘 감사드리고 또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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