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당길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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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방에서 짓는 사과농사\' <농촌과 목회>에 쓴 원고

  • 길벗
  • 2008-05-31 22:4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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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봄 사과 묘목을 꽂아놓고, 그 사이에 옥수수며 감자를 심었습니다.


위 같은 해 봄, 큰 아이 현이가 중학교 2학년 때 할아버지와 집 앞 텃밭에서 일할 때 찍은 모습입니다. 지금은 대학교 2학년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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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이 쓸 수 밖에 없어 제 사는 이야기를 써서 잡지에 싣게 되었습니다.
정리 겸 해서 쓴 것입니다. 좋게 보아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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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과 목회>  ‘귀농이야기’

\'변방에서 짓는 사과 농사\'


-귀농 전 이야기

2001년 3월, 가족과 함께 강원도 홍천으로 내려왔습니다. 귀농을 꿈 꾼지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난 뒤의 갑작스런 일이었습니다. 갑작스런 일이란 그간 생각은 오래 해왔지만 정작 결심을 하고 실행을 하기까지의 시간은 아주 짧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대학 졸업 후 곧바로 들어간 고등학교 교사 생활을 1년 만에 그만 두었습니다. 마침 그 해 전교조가 결성되었습니다. 학교를 그만두고 나와 선배와 부산에서 대형 서점을 열어 2년 정도 서점 사업을 했습니다. 그러다 서울로 다시 올라와 인사동에 조그만 출판사를 하나 차렸습니다만 오래 하지는 못했습니다. 지금은 꽤나 유명한 소설가가 된 성석제 형이 어느 날 불쑥 ‘책도 못내는 출판사 그만 접고 우리 회사에 자리 하나 났으니 그리 오라’고 한 때문이었습니다. 덕분에 91년 초에 생각지도 않게 대기업 그룹 홍보실에 출판 담당으로 들어가 한 10년 직장 생활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어느 날 민음사 주간을 하고 있던 이영준 형 사무실에 들렀는데 우연히 <녹색평론>이라는 잡지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후 그 잡지를 계속 보게 되면서 몰랐던 세계에 대해 눈을 뜨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92년 가을에 귀농에 대한 첫 시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내 고향 평창 인근 영월 동강 줄기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뒤 부모님 밑에서 농사를 짓고 살던 동창을 우연히 알게 된 것이 계기였는데 그때는 그저 서울만 벗어날 수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회사 생활은 힘들거나 어려운 것은 없었으나 조직 생활을 하면 할수록 채워지지 않는 마음 한 구석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자유로운 삶에 대한 동경은 그렇게 시작되었는데 비포장도로를 따라 몇 십리를 들어가서 동강을 나룻배로 건너야 분교가 있는 그런 오지 중의 오지였습니다. 영문도 모른 채 따라간 안사람은 그저 울기만 하고 중학교 졸업 후 처음 본 동창은 그간 몇 번의 전화 통화는 했지만 나의 귀농 결심을 애써 믿는 눈치는 아니었습니다. 그 곳에 세 번을 다녀온 뒤 겨울이 오고 방황은 그쳤지만 언젠가는 산골에 들어가 농사를 짓고 살겠다는 생각은 그때부터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귀농’에 대한 기사만 나오면 스크랩하기 시작했고 또 ‘귀농’과 농사에 관한 책이 단행본으로 나오면 꼭 사서 보곤 했습니다.

그러나 생각 뿐, 현실은 그리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바쁜 회사 일과 또 사람과 술을 좋아하는지라 매일이다시피 모임이 있었고 회사에서 지원해주어 대학원도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밤낮으로 무척이나 몸과 마음이 바쁜 나날이었습니다. ‘언젠가는 간다’는 것은 생각일 뿐 구체적 준비는 하지 못한 채 시간은 속절없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98년 2월 대구 한살림과 <녹색평론>이 공동 주관하는 제1기 공생농두레 귀농학교가 경남 창녕에서 2박 3일간 열린다는 광고가 눈에 띄었습니다. 모집 인원이 20명 남짓이어서 얼른 참가 신청을 하고는 회사에는 휴가를 내었습니다. 다음 글은 그때 교육을 다녀온 후에 쓴 글로 녹색평론 통권 40호에 실렸습니다. 당시의 제 상황과 심정을 알 수 있을 것 같아 옮겼습니다.

선생님,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서울로 돌아와 바로 글을 올린다는 것이 회사 사무실 이전 관계로 여러날 정신이 없다보니 차일피일 미루게 되어 오늘에야 겨우 몇자 적어 올리게 되었습니다. 제가 근무하는 곳이 대기업 사주가 설립한 비영리 공익법인입니다만, 경제가 어려워지다 보니 그동안 있었던 사무실을 내놓고 축소하여 그룹 계열사 건물로 이사를 한 것입니다. 아무래도 그룹의 지원으로 여러 사업을 벌이는 곳이니만큼 가장 먼저 사업시행에 타격을 받는 곳이 저희 같은 사회사업을 하는 곳이지요. 다른 기업들도 홍보비니, 문화사업 지원비 등을 최우선적으로 줄이는 것은 다 같은 모양입니다.

오늘은 새벽부터 봄을 재촉하는 비 때문에 대지가 촉촉이 젖었습니다. 서울이야 비가 와도 산뜻하기보다 오히려 청승스러운 모습입니다만, 아침에 출근하면서는 그래도 약간의 봄기운에 몸을 맡겨보려고 하였습니다. \"이 비 그치면 강나루 긴 언덕에 푸르른 봄빛이 짙어오것다\"고 노래한 어느 시인도 생각났습니다. 제가 사는 곳이 마포이고 사무실이 여의도이다 보니 마포대교를 건너오면서 그런 연상도 하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실상 여의도 뿐만이 아니라 서울 시내를 관통하는 한강 어느 곳에도 그런 풍경을 떠올리게 하는 곳은 없습니다. 그저 고수부지라고 하는 황량한 벌판과 강안 남북이 모두 자동차 고속화도로라 아침이고 낮이고 길게 꼬리를 무는 자동차 행렬만 보입니다. 이게 이 시대 도시에 사는 우리의 익숙한 모습이라 그 누구도 이 풍경에 낯설어하지 않습니다만, 하긴 제가 사는  아파트만 해도 남들은 전망 좋다고 하지만 그저 산꼭대기까지 쳐올라간 고층 아파트 숲과 시멘트로 이루어진 지붕들만 보이는 것이 무어 볼 만한 풍경이겠습니까? 오히려 살풍경한 모습이지요. 나무를 거의 볼 수 없다는 것이 더욱 저를 숨 막히게 합니다.

서울은 정말 단 하루만이라도 탈출하고 싶은 그런 도시지요. 몇년 전 차례로 돌아본 미국과 영국의 대도시들과 비교해도 같은 도시면서도 서울은 정말 기형적인 모습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래도 어느덧 이 속에서 산 것이 얼추 18년이 다 되어갑니다. 가끔씩 돌이켜보면 참 기가 막히다는 생각입니다. 강원도 산골에서 태어나 그래도 앞동산 뒷동산과 개울을 벗삼아 뛰놀던 제가 어찌어찌하여 도시로 나오게 되었는지를 돌아보면, 또 왔다가 돌아가지를 못하고 여기서 대도시의 인구폭발에 한몫을 하면서 살게 됐는지 말입니다.

제가 태어나고 자란 시기가 이 나라의 공업적 발전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던 때라는 걸 생각해보면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고 또 소위 그래도 성공한(?) 삶이라고 하겠지요. 왜냐하면 제 살던 시골에서 당시 우리 부모들의 머릿속에는 모두 시골을 떠나 도시에 사는 것을 성공이라고 생각했었으니까요. 그 결과 모두들, 정말 소수를 빼고는 다 이 서울에 와서, 하다못해 인천과 부천에라도 자리를 잡게 된 것이지요. 몇년 전 시골 제 다닌 중학교에서 총동창회를 한다고 하여 정말 오랫만에 내려가 봤더니 고향을 지키는 이는 손가락을 꼽을 정도고 모두 도회지에서 맘 먹고 내려왔더군요. 이걸 모두들 당연시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긴 시골서 어쩌자는 건지 누구도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니까, 도시에 직업과 돈과 편안함이 있으니까 다들 그런 줄 알고 사는 것이겠지요.

모임에서 라다크에 대한 다큐멘타리 비디오 테이프를 본 것은 생각지 못한 큰 기쁨이었습니다. 그 테이프를 통해 소위 산업화로의 발전이란 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공동체를 해체하는가를 생생하게 본 것이 제 생각을 정리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산업혁명 이후 인류사회가 추구해온 물질문명이 오늘날 어떤 모습으로 우리를 파괴하는지 단적으로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또한 지난 2백년 동안 우리 생활을 지배해온 이러한 세계관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서 사실 혼란스럽고 또 고통스럽게 한 시간이기도 했었습니다. 라다크를 보면서 현재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러한 주류의 삶의 기반에 대해서 송두리째 부정해야 하는 입장에 선다면 과연 그것이 가능한 삶의 모습으로 구체화 되겠는가 고민도 많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이것은 종교적인 자세로 대처하지 않는다면 결국 머리로 이해하는 것밖에 더 되겠는가 하는 결론에 이르기도 했습니다. 주류의 물결을 돌려놓을 만한 대안이 별반 눈에 띄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저의 경우에 한정해서 이번 모임에서 내내 제 머리를 떠나지 않았던 것은 도시에서의 삶(두레적인 삶의 원형이 파괴된 것을 말합니다)에 대한 비판이 결국 감상적 도시탈출 욕구로만 화한다면 이것 또한 해결책이 아닐진대 그렇다고 현재의 삶을 이루는 그 기반(어찌되었든 현재 경험적으로 익숙한)을 어찌해야 할 것인가, 해결책은 잘 보이지 않고 또 함께 하는 가족의 각각의 가치관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등등 평소에도 늘 하는 고민이었지만 모임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다가오더군요.

저는 이번 공생농두레 모임이 단순히 귀농을 준비하는 젊은 사람들을 훈련시키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느끼는 바야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만 저는 이 모임이 세계관을 바꾸는 작업이라고 봤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이 \"농촌의 현재 농민에게서 미래를 볼 수 없다. 도시의 젊은이들에게서 앞으로 우리나라 농촌의 미래를 구하겠다\"는 말씀을 하실 때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너무도 많겠다는 두려움에 싸였습니다. 저의 경우를 예로 들면 저는 우선 준비되지 않은 사람입니다. 농사 기술도 하나 아는 게 없을 뿐만 아니라 육체적 농사 경험도 없는 저 같은 사람이 어찌 농촌에 가서 농사로 생계를 이을 수 있겠는가 하는 두려움 말입니다. 선생님은 내려와서 직접 부딪치면 다 해결된다고 하셨지만 참으로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이 쉽지만은 않으리라 상상됩니다.

이런저런 두려움을 떨치고 농촌으로 내려간다고 했을 때 이것을 두고 저는 거의 종교적 신념이 없으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혼자 내려가 보았자 두레가 되지 않을 것이 뻔하니 결국 뜻이 맞는 사람끼리 모여서 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가장 우선되는 대안이 바로 창녕의 공생농두레 현장으로 가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단순히 농사를 짓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먹거리와 우리 땅을 살려 모두가 잘 살자는 데 우리 두레농업의 근본 뜻이 있으니 이것은 지금의 현실에서 본다면 비주류(?) 운동이지요. 예나 지금이나 주류적 흐름을 떠나 본질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고통과 좌절이 따르지 않습니까. 어찌 생각해보면 독립군 같다고나 할까요?

지난 늦가을에 읽었던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가 저를 이번 공생농두레 모임에 가게 하는 데 힘을 준 책입니다. 제가 읽고나서 마누라도 다 읽었는데 우리는 서로 감동을 받았지만 한편으론 그것이 너무 먼 남의 일로만 생각되는 면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삶, 즉 자연 속에서 자연스럽게 어울려 사는 그런 삶이 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와 구체화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런 고민을 하던 중에 마침 이번 두레 모임을 알게 되었고 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왜 좀더 일찍 눈을 뜨지 못했던가, 자책도 많이 했습니다. 언제나 나와 우리 가족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삶이었고 그것 또한 완전하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지금 하고 있는 이런저런 고민도 결국 고민으로만 끝나고 실천적인 태도를 보여주지 못하는 먹물의 자기위선이 아닌가 의심도 해봅니다. 아직도 구체적 결심과 그것을 실천으로 옮기기에는 부족한 것이 많습니다. 그래서 서른 일곱살 나이에 어찌보면 스무살에 했어야 할 고민을 안고 골몰하는 제 자신이, 또한 이 땅에서의 환경이 안타깝고 쓰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기계적인 삶에 함몰되어 회의도 없이 전망도 없이,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 대해 고민도 없이 살아가기에는 존재의 자기 회의가 너무 깊어 보다 근원적인 삶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또 해결책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그 과정 속에 나의 진실이 담겨있는 것 아닌가 자위해봅니다. 삶은 늘 과정 속에 있는 것이기에 감히 끝은 없다고 봅니다.

마지막으로 모임을 통해 평소에 존경해 마지않던 선생님을 뵙고 또 주장하시는 바에 대해 그곳에 모였던 사람들과 생각을 나눌 수 있었던 시간이 무엇보다도 유익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곳에 모였던 우리들의 삶이 각자 어떤 경로를 따라가든지 이번 모임이 우리에게 큰 화두를 가슴에 던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계속 선생님과 또 공생농두레, 한살림 식구들을 서로 만나고 또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시간나는 대로 틈틈이 두레농장에 내려가도록 하겠습니다. 한가지 바람은 마지막 날 오셔서 새로운 농사 경험담을 들려주셨던 이영문 선생의 태평농법이 아마 거기 모였던 우리들에게는 농사에 대한 현실적 대안으로 다가온 것 같은 데 직접 그 농사짓는 현장을 가보고 또 실습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면 합니다.
두서없는 글을 이만 줄일까 합니다. 함께 하시는 두레 일꾼 모든 분들께도 더불어 안부 전합니다.


-귀농 후 이야기

2001년 2월 마침내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은 아니지만 지척인 강원도 홍천으로 귀농하기로 결심하고 3월에 온 가족이 이사를 하였습니다. 재산이라야 서울 변두리에 있던 조그만 아파트 한 채가 전부였고 그것을 팔아 이곳에 땅을 마련하고 집을 지었습니다.

이곳 홍천은 여름 오이와 애호박이 주작목이라 첫 해 여름에는 남의 밭에서 일을 배운다는 핑계로 일당도 없이 내내 일을 했습니다. 그러다 겨울이 왔고 다음 해부터는 내 밭에서 내 농사를 지어야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참 한심한 것은 귀농에 대해 그렇게 오래 생각하고 짧지만 교육도 받고 또 책도 많이 읽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농사를 어디에서 어떻게 지을 것이라는 확고하고 세밀한 계획은 없었다는 점입니다. 그저 도시를 떠나면 좋았고 또 구체적인 농사는 어차피 부딪쳐야 하는 것이니까 귀농지가 정해지면 그곳에서 남들이 짓는 작물을 나도 한다는 것 정도가 전부였습니다.

2001년 12월에 많은 고민 끝에 이곳 홍천에서 사과를 재배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곧바로 홍천군 농업기술센터로 찾아가 공무원과 상담을 했는데 그이는 한 마디로 절대불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포도 재배를 해서 그 아래 닭을 키우고 여름에 닭을 잡아 팔고 더불어 포도도 팔면 어떻겠냐고 하는데 나는 욕지거리가 목구멍까지 치미는 것을 겨우 참으면서 몇 마디 더 나누다 돌아서 나왔습니다. 그 공무원은 홍천에서 사과가 되면 자기 손에 장을 지진다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나오면서 너무나 기뻤습니다. 공무원이 안된다고 했으니 이 사과 농사가 반드시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2002년 봄에 무턱대고 사과 묘목 700주를 사서 3천 평 밭에 심었습니다. 모두 추석용 품종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어디서 그런 배짱이 나왔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긴 다른 선택의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집을 짓고 난 뒤 오이나 애호박을 하려면 비닐 하우스 시설을 해야 하기 때문에 군에 시설 보조 신청을 했는데 담당 공무원이 와서 보고는 ‘농사경력 없음, 0점’, ‘기존 재배시설 없음, 0점’, ‘밭 경사도에 따라 지원 2순위자’ 서류에 이렇게 적고 지원이 불가할 것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안사람도 여름에 비닐 하우스에서 오이를 따보았기 때문에 자기는 자신 없다고 손사래를 치는 것이었습니다. 고민에 빠져 있을 때 누가 과수 농사가 밭 농사보다는 수입도 낫고 일도 수월하다고 귀뜸을 하였습니다. 농사에 무지한 자는 귀가 얇게 마련입니다. 관련 서적을 보고 또 강원도 농업기술원에서 나온 기후 자료를 검토하고, 무엇보다도 화천에서 사과 농사를 지은 적이 있는 사람을 찾아가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온 뒤 결심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독농가는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농사 초보인 자가 주변에 도와줄 이가 아무도 없는 작목을 홀로 시작한다는 것은 거의 자살에 가까운 모험임을 나중에 알았습니다. 어떤 농사든지 처음 하는 사람에게는 주변에 농사 기술을 전해줄 이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혼자서 독학으로 짓는 농사는 실패와 시행착오의 늪에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농사의 기초지식 마저 전무한 귀농자들의 이런 선택은 돌이킬 수 없는 실수로 이어지기 쉽습니다. 특히 과수 농사는 영년생 작물이라 만약 일년생 작물이었다면 한번 실패를 보아도 밭을 갈아 엎고 새로이 시작할 수 있으나 과수 농사는 한번 심으면 최소한 20년을 끌고 가야만 하는 농사이기 때문에 더욱 어려운 것 같습니다. 농진청 산하 대구 사과시험장에도 먼 길을 마다않고 다녀왔습니다. 그러나 사과 박사이자 공무원인 그들은 사과의 주산단지가 아닌 홍천의 독농가에게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되지도 않을 곳에 사과를 심었다고 에둘러 힐난까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곳 홍천도 사과농사가 잘 된다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온난화의 영향이 확실하게 미치는 것 같은데 이와같은 분위기를 반영한 듯 이제는 과수의 변방 홍천에도 저를 따라 사과를 새로 심은 농가가 10농가가 넘고 현재는 군 농업기술센터에서도 관심을 갖고 지원을 해주고 있습니다.

귀농한 해인 2001년 4월과 그 다음 해 봄에 정농회 초대 회장님을 역임하셨던 오재길 선생님께서 이 먼 곳까지 오셔서 어렵게 귀농을 한 저의 결심이 뜻을 이룰 수 있도록 기도를 해주시고 하룻밤 유하고 가셨습니다. 선생님의 이런 관심과 기도가 얼마나 마음에 큰 위로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제 장모님은 우리 가족이 내려와 산지 8년이 된 지금까지도 우리의 삶의 방식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으셨다는 표시를 공공연히 하십니다. 그걸 보면 가까운 친척과 가족들에게 한 사람의 귀농이 얼마나 큰 충격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래도 안사람과 두 아이들은 잘 따라주었고 또 잘 컸습니다. 92년에는 귀농을 반대했던 안사람이 2001년 귀농할 때는 아무런 군말 없이 선선히 따라준 것은 아마도 도시에서의 저의 삶의 모습이 계속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꼭 산골로 들어간다는 나의 뜻을 조금은 존중해준 탓이라고도 봅니다.

어쨌든 2002년 봄에 사과 묘목을 심어놓고(어떤 이의 표현에 따르면 꽂아놓고) 그저 바라만보고 있었습니다. 사과책이라면 이 책 저 책 부지런히 사서 읽었지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물어볼 사람도, 아는 사람도 없는 처지에서 스스로도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관수 시설도 해야 했고 여러 농사용 기계들을 계속 구입해야 했는데 경제적 여유가 없어서 서서히 농협에 빚을 지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더구나 묘목을 심어 놓았으니 당장의 생계를 이어갈 농사 수입이 없어서 매주 이틀씩 서울로 입시 학원에 강의를 나가야만 했습니다. 겨우 이틀 나가서 벌어온 수입으로 전체 생활을 할 수 있는 금액은 아니지만 그래도 기초적인 생활비는 조금 충당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매년 조금씩 빚이 늘어났습니다. 그 형국은 귀농 8년차인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데 앞으로 어떻게 상환해나갈 수 있을런지가 가장 걱정입니다.

무엇보다도 농사에 계속적인 투자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처음에는 잘 몰랐습니다. 그저 땅만 있으면 농사를 지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철저하지 못한 생각과 준비가 나 같은 귀농인들에게는 공통적인 문제라고 봅니다. 요즘 귀농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그래도 많이 달라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대한민국 어디나 땅값이 너무 올라 이 또한 귀농을 하려는 이들에게 커다란 장벽이 되고 말았습니다. 제가 귀농하던 당시는 그나마 땅값이 요즘 같지는 않았습니다.

2005년에 처음으로 400박스 가량 사과 수확을 할 수 있었습니다. 돈으로는 약 1천만 원 가량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수입 가운데 사과 박스 디자인과 제작비로 절반 정도 나가고 방제차(ss기)를 사고 나니 결국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 사이 아이들은 각각 고등학생과 중학생이 되었습니다. 나가야 하는 매월의 지출은 점점 늘어가는데 농사 수입은 보잘 것 없었습니다.

2004년에 사과 밭의 거름도 해결할 겸 해서 한우를 키우기로 하였습니다. 아버님과 둘이서 집 앞에 허름한 비닐 하우스 우사를 약 40평 가량 지었습니다. 농촌 생활에서는 서울서 직장 생활 할 때와는 달리 항상 경제적인 문제가 뒤따랐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월 꼬박꼬박 나오던 월급이 위대한 존재라는 것을 이곳에 와서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나오고 싶었던 회사를 벗어나 자유를 찾아 산골에 왔지만 그 자유의 댓가는 참 크다는 것을 조금씩 실감하게 되는 나날이었습니다. 귀농자들은 못 하나도 모두 돈을 주고 사야만 하는 처지라는 것도 새삼 알았습니다. 창고도 지어야 하고 하다못해 집에서 먹고자 고추 몇 포기를 심는다 해도 고춧대조차 다 돈이 있어야 구입하는 것입니다.

내 돈으로 소 2마리를 사고 지금은 정년퇴임하신 대학 은사님과 선배가 돈을 합하여 3마리를 종자소로 사 주셔서 모두 5마리로 소 사육을 시작하였습니다. 한우 값이 가파르게 오르던 때라 비싸게 주고 사왔지만 그래도 그 이후 소를 조금씩 늘려 14마리까지 늘렸습니다. 그러나 우사가 비좁아 더는 늘릴 수 없어서 송아지를 낳으면 장에 내다 팔아 소 볏짚과 사료값을 충당하고 남는 것은 우리 집 생활비가 되었는데 상당한 도움이 되었습니다. 시골에서 소는 목돈이 필요할 때 현금이나 마찬가지라더니 정말 맞는 말입니다. 요즘은 1년 전에 비해 사료값이 거의 배나 오르고 반비례하여 소값은 형편없이 하락하여 많은 어려움에 처했지만 그래도 과수원 거름을 스스로 만들 수 있는 것을 생각하면 아직은 견딜만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2006년에 저희 집 사과 농사는 대풍을 이루었습니다. 총 1200상자를 수확해서 추석 전에 모두 팔았습니다. 사과 맛이 좋다고 소문이 나기도 했지만 주위에 아는 분들이 많이 도와주셔서 전량 직거래만으로 다 팔았습니다. 2천 5백만 원이라는 저로서는 큰 돈을 매출로 올렸습니다. 귀농 6년차에 처음으로 수입다운 수입, 수확다운 수확을 맛본 셈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또 복병이 숨어 있었습니다. 사과 농사에 문외한인 우리 부부는 그간 아무런 전문적 지식도 갖추지 못한 채 그저 책과 멀리 화천에 있는 사과농사 경험자에게 전화로 가끔 문의하는 정도로 이 농사를 끌어오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많은 문제점이 늘 있었는데 첫째, 병충해 방제가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둘째, 사과나무의 생리에 대해 무지한데다 시비 관계를 잘 알지 못해 수세 잡기에 그르치고 말았습니다. 셋째, 과수 나무의 전지, 전정은 하루 아침에 알게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와같은 많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한번 심어놓은 나무를 어쩌는 수가 없으니 한 길로 갈 수 밖에 없었는데 천만다행한 것은 2005년에 농진청 산하 사과시험장에서 연 제1기 ‘사과공부방’에 참석하게 된 일입니다. 그곳에서 전국의 사과 재배 농민과 교류하기 시작한 것이 제게는 다른 무엇보다도 큰 공부가 되고 또 가서 보고 들을 수 있는 교육장소가 되었던 것입니다.

작년에는 사과 수확을 한 알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해거리가 아주 심하게 온 것입니다. 그간 밭에다가 소 거름을 매년 과다하게 투입한 결과 나무가 너무 세력이 좋아져서 그만 꽃눈이 맺히지 않은 것입니다. 마치 ‘침묵의 봄’처럼 작년 봄에는 사과밭에 꽃도 피지 않았고 당연히 벌과 나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잘 나가는 듯 싶던 농사와 또 귀농생활에 큰 상처를 입은 것입니다. 오직 가을에 한번 수확을 한 것이 일년 수입의 전부인 사과 농부에게 해거리는 너무나 큰 심적, 경제적 타격을 주었습니다. 사과가 열리지 않음을 확인하였던 작년 봄의 그 극심한 마음의 고통은 겪어보지 않았던 사람은 알 수 없습니다. 마침 큰 아이는 대학을 진학하였던 차라 더욱 압박은 심해졌습니다. 수확이 없는 가을을 지나면서 빈 밭에 선 농부의 마음은 참으로 형용키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나아가는 과정 중에 다 시련이 있는 법이라고 애써 위로를 하곤 했습니다만 아무튼 엎친데 덮친 겪으로 빚을 또 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만 것입니다.

많은 귀농자들이 내려올 때 흔히들 자연과 생태 그리고 자유로운 삶 등을 꿈 꾸는 것 같습니다. 저도 그러했고 당연히 맞는 생각이고 또 필요한 것이라는 데에 이견이 있을 수 없습니다만 이런 관념적인 생각만으로는 작금의 농촌 현실을 헤치고 나아가는데 조금 무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연금이 나오는 은퇴한 분의 자급자족 귀농이라면 모를까 온가족의 생계를 짊어진 말 그대로 전업농이라면 경제적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나갈 것인가를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하고 또 준비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좋은 이념과 방향만 가지고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수단을 갖지 못한 채 한 귀농은 현실에서 곧 이런저런 어려움과 갈등에 처하게 된다고 봅니다. 작년에 나온 책 중에 제목이 정확한 지는 모르겠으나 ‘연봉 5천이 부럽지 않은 귀농’이란 책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제목도 참 한심하다고 보지만 제가 알기로 그 책을 쓴 사람 부인은 현직 중학교 교사입니다. 즉 본인은 그 해 농사 말아먹어도 가족 생계는 전혀 걱정할 게 없는 사람입니다. 저도 십 몇 년 전에 이런 류의 혹은 제대로 된 남이 쓴 귀농 책에 밤이 새도록 침을 발라가며 책장을 넘기던 때가 있었습니다. 오히려 그때가 행복했던 때가 아니겠는가 생각도 듭니다. 귀농과 관련해서 핑크빛 무드만 보거나 일곱색깔 무지개만 보아서는 결코 안될 것입니다.  

요즘도 제 주위에는 귀농에 대해 물어보는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도시 생활이 어렵거나 또는 싫다고 하는 것은 다 이해가 되다가도 제가 그간 겪은 농촌 생활을 돌이켜보면 그만 도리질을 하게 됩니다. 그리곤 되묻게 됩니다. ‘아직도 귀농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그러면서 ‘귀농은 없다’라고 말하고 싶어집니다. 이 지면에서 다 말하지 못하는 여러 고충들을 생각해볼 때 과연 이 시대에 농사를 지어 생계를 이어간다는 생각이, 또 그 행위가 어떤 것일까 해체를 해보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저 자급자족하는 농사라면 전혀 막을 생각이 없습니다만 전업농으로서의 농사는 너무나 많은 희생과 고생이 뒤따른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오재길 선생님은 이미 ‘유기농업 하려면 3대 가난을 각오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귀농하고자 할 때 작금의 관행농처럼 또는 정부 시책처럼 그렇게 무자비하게 온갖 화학농약과 비료를 퍼부어 양으로 승부하는 그런 농사를 지러 오는 게 아니지 않겠습니까? 오래 전 함석헌 선생님은 ‘농사짓는 삶이 가장 정직한 삶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 귀농의 씨앗이 되었던 말씀입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4장 22-24절은 제가 귀농을 결심하게끔 실현시켜준 말씀이었습니다. 갈수록 농사가 어려워지는 이 세상에서 그러나 그저 앞만 보고 나아가고자 하는 많은 동지들이 생겨난다면 굳이 ‘귀농은 없다’라고 말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올해 사과 농사는 조금 나을 것 같습니다. 귀농 8년차쯤 되니 이제는 어제보다 오늘이 낫다는 생각으로 농사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힘들고 어렵더라도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고자 하는 마음도 생깁니다. 어차피 평생을 지어야 할 농사이기 때문입니다. ‘노동하는 것이 기도’라는 말을 되새겨보려고 늘 노력합니다. 저 같이 아둔하고 부족한 것이 많은 사람에게는 농사와 같은 단순한 노동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 삶에 농사를 허락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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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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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산지기 2008-06-02
    저도 예전에 쓴 맛을 경험했던 일이 생각납니다. 목회 초년기에 기독교 농민회 회원들과 성경공부를 함께 하면서 생명농사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고, 먹거리 공동체를 조직하여 유기농 유정란을 생산, 판매하는 일에 나서게 되었는데, 끝은 흐지부지 되고 말었었죠. 총각시절에 모 신앙잡지사의 농촌교회 파트 기자로 잠깐 있으면서 어설프게 안 지식 가지고 무모하게 나섰던 까닭이지요. 농사는 결코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란 것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대대로 이어온 농부들의 경험은 결코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겠죠. 길벗님의 농부로서의 8년간의 경험이 귀하게 느껴집니다.
  • 길벗 2008-06-04
    목사님 말씀대로 농사는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대를 이어 농사짓는 분들을
    귀하게 여겨야 할 줄로 압니다. 저도 이제 10년을 바라보면서 그리고 또 자식에게 함께 농사를 짓자고 하는 아버지로서, 농부로서 많은 것을 생각해봅니다. 늘 곁에서 지켜보아 주시고 말씀주셔서 고맙습니다.
  • 김진웅 2008-06-10
    공감하며 잘 읽었어요. 그대와 함께 같이 여의도 살던 시절 몸무게가 71키로였는데, 지금 57키로로 변한 내 모습이나 그대 모습이나 딱하긴 매 한가지..올해 우리나라 가정 평균 빚이 3천 8백여 만원이라는데, 그래도 난 빚 없이 살고 있으니 부자인 셈. 난, 그대와 형편이 다르니 시골살이가 그래도 몸은 힘들어도 괜찮은데 그댄 사실 넘 용감했어. 그러나 어떤 이 말처럼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고 했으니, 온 전한 발바닥으로 땅 딛고 걸어가 봄세.
  • 우리아빠 2009-04-25
    너무나 귀한 말씀 혼자 보기 아쉽습니다. 저처럼 귀농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꼭 알아야 하는 말씀입니다. 선생님의 글을 백프로 이해할수는 없지만 아주 조금은 알 수 있을듯 합니다. 맘속에 담아두고 갑니다. 행복하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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