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당길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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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재길 선생님을 생각하며

  • 길벗
  • 2008-02-25 23:0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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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을 방문하신 오재길 선생님과 장구지 선생님 그리고 이정희 박사


2003년 겨울 방문했을 때의 제주생명농업 농장 풍경. 당시는 공사 전이어서 시설물이 없고 정리도 되지 않아 좀 황량하다



<아래 글은 재작년에 쓴 글인데 당시 농업진흥청에서 진행하던 농업경영 프로그램에 참가하게 되어 자신의 인생에 영향을 준 분을 소개하는 글을 써오라고 하여 내가 그간 선생님과 나눈 이야기와 시간을 토대로 내 스스로 인터뷰 형식으로 선생님에 관해 써본 글이다.

  봄이 되고 다시 농사철이 돌아오니 자연 선생님 생각이 나서 불현듯 이 글을 찾아 이곳에 올려본다. 그간 이 홈페이지에서 간간히 선생님을 언급했던 것 같다. 그리고 선생님에 관해 간략하나마 소개를 해보겠다고 했던 기억도 있다. 그래서 마침 써두었던 글이나마 어떨까 싶어 무례를 무릅쓰고 올려본다. 뵌지가 몇 년 되었다. 지난 가을에 한번 찾아가 인사를 올린다고 하고는 그만 해를 넘겼다. 그랬더니 올 1월에 선생님께서 먼저 안부 전화와 함께 당근 한 박스를 보내오셨다. 선생님이 먼저 챙기신 것이다. 그저 송구스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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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재길 선생님에 대한 간략한 소개

오 선생님은 1920년 제주도 북제주군 추자면에서 태어나 이후 평양에서 소년 시절을 보낸 후 중국 산동성 탁현에서 청년 시절을 지내다가 광복 직전에 귀국하였다. 6.25 사변 중인 1951년에 고 장기려 박사와 함께 부산 복음병원 창설 멤버로 참여해 병원의 약국 및 원무 책임자로 재직한 바 있다. 이후 서울에서 무역업 및 식료품 사업을 하다가 1961년 그의 나이 41세 되던 해에 농업에 뜻을 두고 경기도 의정부로 귀농하였다. 몇 년 후 다시 양주로 터를 옮겨 2002년까지 농장을 운영하였으나 농장이 택지로 수용되는 바람에 2002년 제주도 표선면 가시리에 3만 평의 새로운 농장터를 일구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선생은 양주 농장에서 보상받은 수입금으로 제주도에 새로운 터를 기초하면서 모든 재산을 사회에 헌납, 현재 농장은 재단법인 제주생명농업 농장으로 명명되었고 86세(2006년도)의 고령인 오늘도 현역에서 젊은이들과 함께 일을 계속하고 있다.


- 선생님은 어떻게 마흔 살의 나이에 생업을 그만두고 농업에 뜻을 두게 되셨습니까?

        그때 6.25가 끝나고 복음병원에서 나와 서울에서 장사를 하고 있었는데 함석헌 선생님 성경 강좌를 매주일 오후에 들었어요. 내 신앙은 이미 십대부터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여 이후 이북으로, 만주로 떠돌아 다니게 되었어도 교회 출석 만큼은 빠지지 않았는데 함 선생님이 성경 강의 중에 “인생에 가장 선한 생업은 농사다”라는 가르침을 주셨어요. 그때 순간 나는 이제부터는 농사다 라고 스스로 다짐을 하고 하던 장사를 정리했지요. 사나이로 태어나서 장사만 하면서 살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거에요.


- 처음에 농사가 어렵지 않았나요?

        처음 2년은 정말 거지보다도 못한 생활을 했어요. 농사도 모르고 또 체력도 안되니 하긴 하는데 도무지 수확도 안되고 몸은 힘들고 그렇게 보냈어요. 그때 농림부 축정국에 근무하던 아는 분이 다녀갔는데 ‘이 사람이 죽지 못해 사는구나’ 그런 감회를 다른 사람과 나누었다고 후에 들었어요. 아무튼 그런 일이 있고 그 뒤에 주위 몇 사람이 도움을 주어 1963년에 양주로 농장터를 넓혀 이사를 하게 됐어요. 한 만평 되었어요. 그러나 시련의 연속이었어요. 그때는 안해본 작물없이 이것저것 다 했는데 가난하기는 매 한가지였어요. 1967년에는 막내 아들이 죽는 일이 일어났지요. 그때 돈이 없어서 병원을 못가 그리 된 것이어서 안사람과 내가 깊은 실의에 빠진 적도 있었어요.  


- 선생님은 1976년 정농회를 조직, 초대 정농회 회장을 맡으셨고 이제까지 우리나라 유기농업을 이끌어오신 산증인이신데요. 어떻게 그때 그런 생각을 하시게 되었고 또 농민조직을 하시게 되었는지요?

             그때 원경선 목사님 등과 매년 집회를 정기적으로 가졌는데 1975년 가을에 일본에서 강사 한분을 모셨어요. 신앙이 아주 돈독한 분으로 경도대학 농학부를 나오신 분이었어요. 그분이 여러 얘기를 하셨는데 그중 원숭이가 농약 묻은 사과를 먹고 기형아를 출산한 일과(원숭이 어미가 눈물을 흘리는 사진을 보여줬지요) 일본 북해도의 젊은 부부가 쌀농사를 7천 평 하는데 낳는 아이마다 무뇌아가 태어나 곧바로 죽었다는 거에요. 검사 결과 잔류 농약 독성 때문에 그랬다는 거지요. 굉장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농약의 피해에 대한 직접적이고 산증언을 들은 셈인데 농약 뿐만이 아니라 화학비료의 해독에 대해서도 많은 얘기를 하셨지요. 그 이듬해인 1976년에도 그 선생님이 오셔서 또 같은 내용의 강연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정농회가 탄생한 거지요. 그때 정농회를 만들 때 정관 얘기가 나왔는데 성경 말씀을 정관으로 삼는 것이 최상이다 그렇게 결론지어서 처음에는 정관도 없이 농민단체를 구성했어요. 아마 농민단체를 만들면서 성경을 정관으로 삼자는 단체는 정농회 밖에 없을 거에요. 그때 그 공부모임에 공부 많이한 사람이 여럿 있었는데 저보고 회장하라고 해서 걸머지게 되었지요.


- 선생님은 왜 유기농업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유기농업이 뭔지, 왜 농약을 쳐서는 안되는지를 몰랐을 때는 우리의 지혜가 열리지 않아서 그랬다지만 이제 농업의 지난 역사를 알게 되고 또 그것이 인류를 망치는 왜곡의 과정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양심의 소리를 따라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이제까지 성경이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바로 그 목소리입니다. 지금 우리 지구가 핵문제, 에너지, 환경, 산업, 문화 등 모든 사회 분야에서 파멸로 치닫고 있는 것을 벌써부터 목도해오고 있습니다. 모두들 돈과 효율성으로만 계산하려는 시대에 우리 인류는 사상도 건강도 이미 타락해버렸습니다. 그래서 농민은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니까(정치를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각자가 짓는 농사에서 하나님이 주신 방법대로, 건강한 농사를 지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것은 생명을 살리는 농사, 곧 유기농일 수 밖에 없지요. 화학비료의 해독을 우리는 이미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농약은 말할 것도 없고요. 농사꾼은 그래서 사람을 볼 것이 아니라 하늘을 보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되는 사람들이라고 봅니다. 그랬을 때 우리 농업이 농민 뿐만 아니라 온 인류를 살리는 농업이 된다고 보기 때문에 농사는 유기농업으로만 지어야 한다고 봅니다.


- 그런데 유기농업은 힘들고 또 그런 만큼 소득이 되지도 않는다는 비판이 있는데요?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는다’라는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농사꾼이 어떤 상황에서건 욕심이 작동되면 그 결과는 죄악이 탄생되고 또 그 결과는 사망으로 유도된다 그렇게 생각해요. 남들이 하기 때문에 하고 남들이 어렵다고 하면 안하는 그런 자세가 아니라 성령이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으로 이 농사를 짓는다는 작정이 있어야만 합니다. 저는 유기농업하려는 이들에게 들려주는 말이 있어요. 유기농업 하려거든 3대 가난을 감수하라고요. 그만큼 현대 농업에서 유기농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또 정부의 정책이라든가 세계적으로 돌아가는 형편이 우리 농업에 만만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이 고집을 꺽으면 안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인류의 최후 보루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건강한 먹거리 없이 어떤 일도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 연세가 꽤 있으신데도 아직 농장일을 직접 하시고 또 관장하시는데요. 앞으로 계획을 말씀해주세요.

        내가 100살까지는 살아보려고 합니다. 현재 운영하는 제주생명농업이 젊은이들이 귀농을 준비하는 교육장으로 기능하기 위해 앞으로 할 일이 몇가지 더 있어요. 지금은 함께하는 젊은이들과 자체적으로 살아나가기 위해 당근과 감자 농사를 중점적으로 짓고 있고 또 야채 효소 공장도 마무리되어 앞으로는 농장 소득이 좀더 늘어날 걸로 봐요. 나이는 있어도 아직은 움직이는데 큰 어려움이 없습니다. 재작년에는 유럽으로, 작년에는 쿠바의 유기농업을 시찰하러 다녀왔지요. 아직도 우리는 배우고 또 실천해야 할 것이 많습니다. 바람이 있다면 뜻을 가진 젊은이들이 많이 농업 분야에 왔으면 하는 거지요. 농업이 분명하게 살아있지 못하면, 그러니까 먹거리를 남의 손(외국)에 맡기는 나라는 미래가 없다고 봐요. 정부는 자꾸 자동차, 텔레비전, 핸드폰 팔아서 쌀 사먹자고 하는데 근본적으로 잘못된 생각입니다. 생각을 가진 젊은이들이 농업으로 돌아오도록 만드는 것이 나의 이제부터의 사명이라고 봅니다.

<후기>

     오재길 선생님과는 지난 2000년 어느 농업인 모임에서 우연히 만나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나는 이미 그 훨씬 전부터 선생님의 이름과 하시는 일을 들어서 알고 있었으나 직접 뵙기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나는 그때 귀농을 앞두고 준비 중이었기 때문에 선생께서는 대기업을 그만두고 귀농을 준비하는 나를 처음부터 눈여겨 보셨던 것 같다.

     2001년 초, 내가 드디어 강원도 홍천으로 귀농을 결행하자 선생님은 그해 봄 홍천 우리 농장으로 친히 오셔서 하룻밤 묵으시며 기도를 해주시고 돌아가셨다. 나도 시간나는 대로 양주의 선생님 농장으로 몇번 찾아뵈었다. 만나면 늘 많은 말씀을 해주셨고 그러다가 선생님은 2002년 제주도로 내려 가셨고 그 이듬 해 나는 안사람과 함께 선생님이 새로 개척하시려고 하는 제주도 농장을 방문하였다. 그때는 땅만 사놓으셨을 때라 숙소도 마을의 빌라를 임시로 얻어 거쳐하고 계실 때였다. 2004년 초에 선생님과 함께 유럽으로 21일간 유기농업 시찰을 함께 간적이 있다. 그때도 방을 함께 쓰면서 가까이서 선생님의 삶을 보고 들을 기회가 있었다. 선생님의 삶은 그 자체로 우리 젊은이들의 사표이다.

     나는 선생님의 삶과 말씀에서 첫째, 불굴의 의지를 배운다. 농업과 삶에 대한 강한 사랑, 넘어져도 또 일어서는 그 강인함. 선생님의 그 의지는 모두 성경에 기초해 있다. 성경 말씀대로 살아오신 그 삶이 어떤 환경에서도 극복하고 넘어갈 수 있는 불굴의 의지를 준 것 같다.

     둘째, 나는 선생님의 긴 안목과 넓은 시야를 존경한다. 농사를 짓는다고 해서 삶 자체가 농업에만 매달리는 우물안 개구리가 되서는 안되는 것이다. 농사를 짓되 이 농사를 왜 지어야 하며, 어떤 의미가 있으며, 또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등 농사를 통한 나의 삶 속에서 내가 이 세상에 왜 존재해야 하는지에 대한 폭넓은 가치관을 가져야한다는 것을 선생님으로부터 배웠다. 실제 선생님은 필요한 것은 나이에 불문하고 배우고 또 실천해오신 분이다. 그것이 정농회를 조직하고 또 그 이상을 펴오신 증거다.

     셋째, 나는 선생님의 삶으로부터 사랑을 배운다. 자기만을 아는 이기적인 삶이라면 3대 가난을 얘기할 수 없다. 이웃과 국가와 온 인류를 사랑하는 그 도저한 마음 속 깊은 사랑을 나도 깨닫고 또 실천하고 싶다. 유기농업을 하러 들어온 나의 귀농, 그러나 나의 뜻과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 역시 현실이라는 벽 앞에서 아직도 실험 중이다. 그러나 선생님의 삶으로부터 많은 힘을 얻고 있다. 결국은 나도 사과농사에서 그 어렵다는 무농약 재배를 실현하고야 말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유기농업 재배까지도 욕심을 내고 싶다. 이런 어려움을 이기려면 그 무엇보다도 사람을 사랑하고, 농사를 사랑하고 또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그것이 원동력이라고 보는 것이다.

     선생님은 고령이신데도 불구하고 누구보다 건강이 좋으셔서 많이 안심이 된다. 앞으로 할 일이 많으신데 건강하셔야 그 일들을 다 이루실 것이다. 그런데 건강하시기 때문에 그 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할 일이 많으니 아직 건강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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