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당길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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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친구, 명수네 가족이 다녀가다

  • 길벗
  • 2006-05-29 10: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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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빈이와 주엽이. 얼마나 이쁜지.


우리집 마당에서 명수네 가족

누구나 그렇겠지만 이제까지 살면서 참 많은 \'친구\'를 두었다.
어릴적 유치원 동창에서부터 초등학교, 중학교.... 대학원, 또 사회 친구까지.
그런데 와인과 친구는 오래될수록 좋다는 말처럼 그 많은 친구 중에서도 초등학교 동창은 좀 특별하다는 생각이 든다.

초등학교 3학년부터 중학교 2학년까지 같은 반이었던 명수가 처음으로 가족과 함께
우리 집에 왔다. 중학교 졸업 후 명수는 영월에 있는 공업고등학교로, 나는 춘천으로
고등학교를 가는 바람에 그 이후엔 만나지 못했다. 92년 무렵 우연히 연락이 닿아
서울에서 두세번 보았다가 그 이후 다시 연락이 끊겼다. 그러다가 십몇년 만에 이렇게
또 만난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명수는 키가 작다. 그러나 키가 작아서 못하는 일은 없었던 것 같다.
축구도 잘했고 공부도 잘했다. 70년대 초중반에 강원도 산골에서 초등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월드컵 축구는 당연히 만화방에 빼곡히 들어앉아 시청해야 했다. 명수는 말도
많았고 잘했다. 특히 축구 해설은 누구보다 정보도 많았고 또 정확했다. 그때는 김정남,
차범근, 이세연(골키퍼), 이차만 등의 선수들이 국가대표로 활약했었고 세계적인
선수로는 단연 펠레가 우리의 우상이었다. 유세비오라는 선수도 기억이 난다.

명수네나 우리나 가난하기는 매일반이었는데 그래서 점심을 굶는 때도 있었다. 내 기억에
번데기를 처음 사먹은 것도 명수와 함께였다. 시골에서 자랐어도 나는 그당시 누구나 먹는 메뚜기나 개구리, 번데기를 먹지 않았다. 좀 결벽증 비슷한 것이겠는데 하도 배가 고파서
하는 수 없이 하교길에 명수와 함께 번데기를 먹었던 것이다. 아마 빵 사먹을 돈은 모자랐고 그나마 번데기가 제일 싸서 그랬을 것이다.

중학교에 와서도 명수와 나는 같은 반이었는데 초등학교 때보다는 서로에게 관심이 덜했던 것 같다. 내가 보기에 명수는 자기는 키가 작은데 이상하게 덩치가 큰 친구들(운동부 애들이었다)과 어울리기 시작했고 공부는 좀 멀어진 것 같았다. 나는 그때도 키가 커서 중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씨름부에 들어오라는 압력을 받았다. 초등학교 때도 핸드볼 부에 오라고
하는 것을 끝까지 거부하여 결국 뺨 몇대를 맞고 풀려난(?) 적이 있는데 이번엔 씨름부였다. 운동에는 관심이 없어 또 끝까지 거부했더니 결국 엉덩이를 무수히 맞고 난 뒤에야
풀려나올 수 있었다.

아무튼 중학교 시절엔 명수와 이런저런 추억이 없는 것을 보면 그 조그만 학교에서도 소위 노는 물이 달랐던 것 같다. 그때의 나는 춘천고등학교에 입학하는 것이 지상의 목표였기
때문에 2학년 때부터는 새벽 4시에 일어나 공부를 하곤 했다. 당시엔 고등학교 시험이
있을 때였는데 강원도 정선에서도 신동읍 그 산골 중학교에서는 춘천고등학교에 매년
한 명 정도 갈까말까 하는 수준이었다. 춘천중학교에서 150명 이상이 진학하는 것과
비교했을 때 비교할 수 없이 큰 학력 차였다.

아마 명수도 유학갈 형편이 되었다면 나와 함께 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업계로 가야 한다는 생각에 아마 공부를 등한시하지 않았나 짐작될 뿐이다. 어쨌든
우리는 그 이후 각자의 길을 갔고 이제 40대 중반이 되어서 만났다.

명수는 지금 성공한 소기업 사장님이 되었다. 공고 전기과를 나와 한 십년 회사 생활을
하다가 나와서 독립을 한 것이다. 타고난 머리와 뚝심이 그를 지금의 안정된 삶으로
이끌었으리라 쉽게 짐작이 된다. 무일푼으로 상경해 이제는 강남에 넓직한 아파트도
장만하고 직원도 다섯명이나 둔 어엿한 사장님인 것이다. 돈 버느라 장가를 좀 늦게 가
이제 큰 딸이 초등학교 2학년이지만 정말 맘 착한 마누라와 그늘없이 자란 두 아이가
보배였다.

명수는 내가 우리 두 아이를 풀무농고에 보낸 것을 두고 놀라워 하면서도 나의 가치관에 대해 이해하려고 했다. 아마 우리나라에서 본인이 실업계를 나온 부모가 자식을 다시 실업계에 보내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그게 한국에서 살아본 우리 세대의 일반적인 생각일 것이다.
명수는 아이들이 어려서 이런저런 생각이 아직은 미치지 않을 것이다.

오랫만에 만나 밤 늦도록 얘기를 나눴다. 주로 옛날 초등학교 때 이야기다. 그러고보니
내가 잊은 것을 명수는 기억했고 또 나의 기억에 새로워하기도 했다. 지금도 어릴적 명수의
얼굴과 말하는 표정이 나는 또렷이 기억이 난다.

이제 한 가정의 가장이 되고 40대 중반의 나이가 되니 얼굴도 변하고 또 늙어가고 있지만
우리의 만남에서 만큼은 우리는 늘 초등학생인 것이다. 그러고보니 동창을 만나는 이유가 바로 젊어지고 싶어서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왜냐하면 각박한 세상에서 찌들고
힘들다가도 그때 만큼은 우리 모두가 어린아이가 되기 때문이다.

명수야, 네 얘기 좀 주저리주저리 썼다. 네 귀한 두 아이(예빈이와 주엽이) 말처럼 주말마다
놀러와도 좋다. 건강하고 사업 번창하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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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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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은희 2006-05-30
    사람마다 가슴 속에 소중한 추억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살며시 미소지을수 있는 기억을 함께할 수 있다는 건 참으로 감사하고 축복받은 일이죠 두 친구분를 보면서 참으로 열심히 잘 살아왔구나 참 부러웠습니다 처음 홍천으로 향할 땐 조금걱정이 되었는데 오길 잘했구나 너무너무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이였습니다 인자하신 할아버지 다정다감하신 현이 엄마 모두가 포근한 고향 같았어요 신나하는 아이들를 보면서 덩달아 신이나기도하고 아이들 일기장 가득 길벗식구들이 메워지는걸 보면서 우리아이들에게도 소중한 추억을 하나 만들어 주었구나 감사하고 행복했습니다 지금처럼 감사하는 마음으로 남은 추억을 만들어 갈 수 있었으면 하는 기도를 해 봅니다 늘 건강하시고 지금도 매일 가고싶다는 주엽이 예빈이 말처럼 저도 또 뵙고싶어요 너무 즐거웠어요 풍요로운 길벗 되세요^^~
  • 히로시마김 2006-06-05
    안녕하심까? ^^
    수하리 어딘가에 자리를 틀고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언젠가 전해듣고나서, 이후 한번쯤
    검색을 해 보았었었지...

    그리고, 지금 서울생활을 하는중에 아주 빈번히 만나는 술친구 이명수로 부터 근간에 수하리를 방문했다는, 아니 조만간 방문하려고 한다는 이야기부터 또 방문하고 왔다는 이야기까지 .. 암튼 많은 부분은 아니지만 자네의 근래의 단면들 몇장면을 전해들을 수 있었네.

    이명수가 다녀온뒤 아주 좋은 나들이였다고 입이 마르도록 이야기 하더군...
    조만간 또 다녀올것이라고도 하고...

    어느새 6년여의 세월이 흘렀구만... 적지 않은 시간을 새로운 곳에서 자리내림 하느라 많은 노고가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네... 부럽기도 하고 대단하다고 여겨지는 것 또한 사실이네..

    난 자네와 이명수의 관계처럼 그 비슷한 처지에 있는 친구이네. ^^
    제법 오래전, 서울에서 계획에 없이 어울리다가 자네집엘 다른친구들과 간적이 있었지..
    그때 거실 한켠에 자리하고 있던 진공관앰프가 아직도 인상적으로 기억되고 있네...^^

    송재복 이란 친구한테 농사지을 땅 타령(?) 하고 다닌다는 소릴 들은것도 벌써 제법 오래전 이야기 이구만...^^

    정선 어디쯤에서 자리를 붙일줄 짐작했었는데, 홍천 서석으로 터를 잡았을줄이야...^^
    많은 준비와 노고로 인해 어느정도 자리메김을 해가고 있는 것으로 여겨져서 다행스럽고, 또 흐뭇하게 생각되네...

    앞으로 다가올 많은 날들도 자네가 바라는 대로, 원하는 만큼, 그렇게 이루어 지길 기원하겠네. 그래야 자네덕에 사과라도 한개 얻어먹을수 있지 않을까?? ^^

    예빈이와 주엽이가 많이 좋아했을것을 생각하니 이명수가 애비 노릇을 아주 톡톡히 하고 온 그런 나들이가 아닌가 여겨지네. 이 또한 자네가 그럴듯한 곳에서 보기좋은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겠지....

    생전 처음으로 몇줄의 글을 자네에게 적어 보았네. 좀 뻘쭘하기도 하고..^^
    아버님과, 식구들, 그리고 자네의 건강을 기원하며 서울사는 별로 친하지 않은 친구가 안부글 보내네... ^^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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