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당길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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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불출>이 게시판에 쓴 글 \'어머니\' 이곳에 다시 올립니다

  • 길벗
  • 2006-04-11 12:5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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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1.222.170.96
- 많은 분들이 얘기하셔서, 또 혹 못 읽으신 분들을 위하여 이곳에
  다시 올립니다. 지은이 <미불출>님은 제가 서울서 직장 생활 할 때 업무
  관계로 알고 지내던 분으로 지금은 고향에 돌아가 농사(밤나무)를 짓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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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 어머니

천지신명이시여!
부디 내세에는 사람으로 태어나게 않게 해 주시옵소서.
선업이 부족하여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야 한다면
울 엄마 아들로만 태어나게 해 주시옵소서!



◈ 울 엄마 1

   국민학교 4,5학년 쯤이었던가 용주사 절 가는 입구 마을에서 어머니를 만났다. 어머니는 머리에 홍시감을 팔러 다니느라 함을 이고 계셨고 나는 가을 소풍을 가는 도중이었다. 당황스럽고 부끄러웠다. 엄마가 장사를 하러 다닌다는 게.  함께 가던 친구들과 에돌다 엄마에게 슬며시 뛰어갔다. 엄마가 감을 하나 주셨다. 얼른 받아들고는 친구들이 볼 새라 그냥 친구들 무리 속으로 파고 들었다.
  세월이 한 참 지난 후 엄마가 지난 날을 회고 한 적이 있다.  내 태어나기 전에는 바가지를 들고 문전걸식으로 식구들 생계를 이어간 적도 있고, 함에 감을 너무 많이 담아 목에 침을 삼키기 어려운 때도 있었다고.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했듯 나는 그런 어머니를 외면했다. 알랑한 그 학급반장 체면 때문에...


◈ 울엄마 2

   중학교에 들어 간 그 해 봄날이었던 것 같다. 집에 오는 도중 들판에서 어머니를 만났다. 휑한 눈 빛, 흘러내린 머리카락, 앙가슴이 벌어지지 않을 정도로 매듭한 윗저고리, 손에 든 보따리 등등 엄마 맨드리가 아무래도 심상치 않았다. 어디 가느냐고 물었다. 기운없는 목소리로 ‘어디 좀 댕겨오마’ 하신다. 아무래도 미심쩍어 다그쳐 물었으나 똑 같은 대답만 남기면서 휘적휘적 읍내쪽으로 걸어 올라갔다.  집으로 뛰어갔다. 아버지는 술에 취해 드러누워 혼자 말처럼 중얼거리고 계셨다.  ‘그년 갔다. 지 옷 다 불살라버리고’  마당에는 아직도 다 사그라지지 않는 재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나는 경황이 없었다. 가방을 팽개치고 들판길로 내처 달렸다. 그러나 그 넓은 들판에 엄마 발자취는 보이지 않았다. 산으로 뛰어올라갔다. 해는 뉘엇뉘엇 서산으로 넘어가고 있었고 그 곳은 공동묘지였으나 무섬증을 느끼기에는 내 마음이 너무나 다급했다.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엄마를 불러댔다. ‘엄마아!’ ‘엄마아 !’  내 살면서 그토록 누군가를 애절하게 불러본 적이 있었던가.  결국 엄마를 찾지 못하고 동구 밖에서 서성이며 해가 질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해가 져서 지척을 분간키 어려울 즈음에야 어둠을 뒤집어 쓰고 엄마가 나타났다.  엄마는, 울 엄마는 나를 잡고 한참을 서럽게 울면서 얘기했다. 내가 부른 ‘엄마’소리에 보따리 끌어안고 싫건 울었노라고, 발이 떨어지지 않았노라고.


◈ 울엄마 3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엄마가 학교에 오셨다. 나를 학교에 보낸 이후 학교라는 곳에 오신 건 처음이다.  어버이 날 장한 어머니상 표창장을 받기 위해서였다. 나는 부끄러웠다. 엄마가 학교에 온 것만해도 부끄러운데, 더구나 남들 앞에 나서서 상을 받는다는 건 나를 더 부끄럽게 했다. 친구들과 어울러 운동장에서 공을 차고, 철봉놀이를 하고 평행봉을 하면서 애써 행사장을 외면하고 있었다. 애국가가 울러 퍼지고 식이 시작되었다. 나는 조바심이 났다. 그래도 엄마가 상을 받는 모습은 봐야 할 것 같았다. 교실을 두 개 합쳐 만든 강당으로 뛰어가 쌓아놓은 책상 밑으로 기어 들어가  어머니가 상을 받는 모습을 보려 했으나 참석한 학부모들에 가려 볼 수 없었다. 결국 요란한 박수소리로써 어머니가 상을 받았다는 걸 확인하고는 교실을 빠져나왔다. 운동장에서 겸연쩍게 어머니를 만났다. 어머니는 스텐그릇 한 개와 표창장을 들고 나오셨다. 나는 얼른 집에 가라고 재촉을 해댔다. 동네 아줌마들은 어머니 뒤에 따라오며 아우성을 쳤다. 상을 받았으니 막걸리라도 한 턱을 내라고. 그러나 엄마 호주머니에 한 턱낼 돈이 있을리 없다. 아니 돈 한푼이 있을 리 없다. 아들의 외면 속에 엄마는 종종 걸음으로 도망치듯 그렇게 사라져야 했다.
영화 ‘피아니스트’에서 독일군에 들키지 않기위해 아이 울음을 손으로 막다가 아이를 질식시켜 죽여버린 실성한 유태인 엄마의 피울음 소리가 들린다.  ‘왜 그랬을까?’ ‘왜 그랬을까?’ ‘내가 왜 그랬을까?’
정말 내가 왜 그랬을까? 어머니에게 그 좋은 날에-

* 그 표창장은 우리집 ‘길벗방’ 벽에 걸려있다.


◈ 내 젊은 날 하루살이  

‘과장님 ! 야간대학에 합격 했는데예’
‘뭐라꼬, 어 큰일났네’

못 갖춘 조건이 실연의 이유가 되어 조건 한번 갖춰보자고 야간대학에 지원을 한 것인데 덜렁 합격이 된 것이다.  과장 몰래 대학을 다니기는 힘들 것 같아 떨어지지 않는 입으로 겨우 모기만한 소리로 얘기를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과장의 반응은 심각했다. 그도 그럴것이 다른 과 직원들이 야간대학 다니는 것을 근무태만으로 단속을 하고 있던 인사과에서 그 직원이 야간대학을 다니겠다고 나섰으니 말이다.
그러고서 두 사람사이 정적은 긴 터널을 지나고 있었다.
‘응 그래, 일단 축하한다.’ 과장이 먼저  햇빛을 보여 주었다.  

  그러고서 나는 눈치대학을 다니기 시작했다.
‘회사는 주업, 학교는 부업이니 언제라도 회사에 누가 된다면 학교는 그만둔다’는 각오로 회사 일했다. 어떤 날은 회사 청소 아줌마 보다 더 일찍 회사에 출근하여 잠긴 문이 열리기를 기다려야  했고, 어떤 날은 직원들이 모두 퇴근한 후 카페트가 깔린 임원회의실 방석 위에 누워 행사용  태극기를 이불삼아 잠을 자며 밀린 업무를 처리하기도 했다. 어떤 날은 수업시간에 바투게 겨우 퇴근을 하였지만 버스 안에서 잠이 들어 버스종점까지 갔다오는 바람에 그냥 자취집으로 오는 경우도 있었다. 지금도 차 안에서 잠을 잘 자는 버릇은 아마 그 때 들었는 지 모르겠다. 새내기 1년은 내가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사는 지를 물어볼 틈도 없이 그렇게 지나갔다.  군대서 휴가 나온 고향후배가 선배님이라고 전화를 했는데 나는 그를 모르노라고 부인도 했다. 고향도 선후배도 잊고 살았던 그 시절... 그러니 설마 연애라니 내게는 그저 부러운 사치품일 뿐이었다.

엄마는 내가 대학에 다니는 지, 자취를 하는 지도 몰랐다. 추석, 명절에도 밀린 업무와 학업은 나를 집에 내려가지 못하게 했다. TV로 귀성전쟁이 벌어지는 모습을-그 때는 열차표, 고속버스표 예매하는 것, 본 엄마는 내려오지 않아도 되니 그냥 전화만 해라고 하셨다. 용돈 몇 푼 보내드리는 것으로 그렇게 효도를 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던 어느 해 집에 내려 갈 기회가 있었다. 지난 해부터 대학교에 다닌다고 엄마한 테 얘기를 했더니  ‘회사 댕기기도 힘드는 데 대학은  뭐할라꼬 댕기노’하셨다.

초겨울 어느날! 아마 그 날도 자취집에 도착하니 연탄불은 꺼져 있었으리라. 가끔은 이웃집 할아버지가 연탄불을 갈아주시곤 했는데 보통은 꺼져 있었다. 아무리 공기구멍을 작게 열어놓아도 아침 6시부터 밤 10시까지 견디는 연탄은 없었기 때문이다. 급히 번개탄에 불을 붙여 그 위에 연탄을 올리고 잠을 잤다. 초겨울이었지만 두꺼운 이불이 없어 스폰지 잠바를 입고 여름용 카시미론 이불을 덮고 잤다. 이불은 친구가 준 것이고 베개는 없어서 영어사전을 베고 잤다. 스폰지 잠바는 등산할 땐 등산복, 잠잘 땐 잠옷, 외출할 땐 외출복이었는데 고동색이라 때도 타지 않아 그야말로 내게는 꼭 어울리는 옷이었다.

  한기가 들어 눈을 떴다. 본능적으로 방바닥에 손을 갖다대었더니 싸느랗다. TV는 고사하고 시계도 손라디오 하나없이 살던 때였기에 시간을 가늠할 수 없었다. 추운데 밖에 나가 다시 번개탄을 써가며 불을 피우기가 싫었다. 등산용 버너에 불을 붙혔다. 보증금 20만원, 월세 2만원의 부엌도 없는 방에서 밥을 해 먹고 살았기에 방안에 주방기구가 다 있었다. 주방기구라야 후라이팬 한 개, 등산용 코펠과 버너가 전부였다. 냉장고는 물론 없었다. 김치가 있으면 성찬, 그저 계란과 진간장으로 밥 비벼먹으며 근근이 살아가던 시절이었다. 물론 라면은 요즘 밥 먹듯이 했고.

버너 불에 손을 쬐기 시작했다. 그래도 한기는 가시지 않았다. 성냥팔이 소녀생각이 나 고소를 금치 못했다. 나는 무슨 늙은소년일까하고. 사방중 세 벽이 창호지로 바른 문으로 되어있으니 황소바람이 이보다 더할까.  할 수없이 아침에 먹다 남은 식은 밥을 물에 넣어 버너에 올리고 끓이기 시작했다. 추울 때는 따뜻한 국밥을 먹어 속을 뎁히면 추위가 가신다는 아버지의 말이 생각이 나서다.  물이 끓는 동안 팔굽혀펴기도 하고 일어났다 앉았다 하며 몸에 열을 내었다. 끓인 밥을 목구멍에 부어넣고 다시 잠을 청했다.

  고향집이 보였다. 어머니가 내가 자고 있는 방 부엌 아궁이 앞에 앉아 쇠죽을 끓이느라 장작불을 때고 있었다.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을 보며 따뜻한 방에서 포근히 푹 잠을 잘 수 있었다. 기지개를 쭉 키고 눈을 떴다. 이불 속이 너무 따뜻하고 내 몸엔 한기가 전혀 없었다.  참으로 이상했다. 얼른 이불 밑으로 손을 넣어 보았다. 여전히 방바닥은 얼음이었다.

아!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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