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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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간 큰 처남을 생각하며...

  • 길벗
  • 2019-02-28 09:2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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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살 끝에 심한 목감기로 기진해 있다. 제대로 된 자연발효 사과식초를 앞으로 내가 전문적으로 생산하기 위해 굳이 자비를 들여 설 연휴 이후 일주일간 프랑스에 견문을 넓히러 다녀온 뒤에 찾아온 탈이다.

그저 여행 탓만은 아닐 것이다. 돌아온 바로 그 다음 날 지난 3년 동안 우리 집에서 동고동락(이라고 쓰지만 동락보다는 동고가 더 우세한)했던 처남이 갑자기 세상을 뜨는 지경을 당하여 여독을 풀 틈도 없이 그 뒷감당을 하느라 이제사 몸과 마음이 아픈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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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다 한 살 많은 처남은 아내의 오빠이자 그 집안의 장손. 파주가 고향이고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넉넉한 전답이 있어 어릴 적부터 어려움 모르고 자란 사람. 그러나 초등학교 고학년 때 형제남매가 서울 신촌으로 유학 와서 외조모의 뒷바라지를 받으며 서울 생활. 70년대에는 지방의 넉넉한 가정들은 아이들 교육을 위해 이렇게 서울로 일찌기 보내는 풍조가 있었다. 그러나 아마 무척 외로웠던 모양. 중학생 때부터 이미 신촌 창서 초등학교 담벼락에 밤이면 줄지어 선 포장마차의 단골이었다니.

내가 복학 후 안사람과 연애질 할 때 그는 방위 마치고 파주 본가에서 무위도식. 소위 요즘말로 취준생도 아니고 그저 부친 수의사 사무실에서 가끔 심부름이나 도와주면서 소일. 서울에 이름도 못들어본 어느 상고를 간신히 나와 남대문 옷가게에서 점원 노릇도 일년 했었다고.

나이도 비슷하고 술 좋아하는 것도 통해서 그때 자주 신촌에서 파주(문산 가는 통일로변에 있던 어떤 색시집에 가끔 그의 인도로 따라갔다)에서 통음을 하곤 했다. 술은 나보다 많이 약했다. 하긴 그 시절의 나는 말술도 두려워하지 않는 주통(지금은 빈통...).

내가 먼저 그의 여동생과 결혼하고 그 다음 해 그도 수의사 사무실에 근무하던 \'미스 리\'와 결혼했다. 그리곤 나는 이대 후문 봉원동에서 그는 신촌에서 신혼 살림을 각자 차렸는데 걸어서도 만날 만큼 가까우니 또 자주 술판을 벌이곤 했다.

그는 부친이 전답을 팔아 마련해준 자금으로 이런저런 \'사업\'을 벌였다. 난 직장 댕기고. 하지만 금방 말아 먹고 새사업을 벌렸고 그럴 때마다 날 불러서 자랑 겸 소개를 잊지 않았다.

어느 때부터인가 그는 알코올 중독이 되어 있었다. 짚어보니 그의 나이 삼십대 초반 아이들이 아직 유치원생이었을 때 이미 술 중독이 되었던 것 같다. 가끔 사무실로(아직 핸드폰이 대중화되지 않았던 90년대 초중반) 전화가 와서 받아보면 장모의 울먹이는 목소리, 급히 신촌 세브란스로 가보면 코뼈가 부러진 처남댁이 응급실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성질이 보통은 넘는 여자였다) 파주에서 급거 상경한 장인장모는 우시고 나는 그 모든 광경을 멍하니 쳐다볼 수 밖에 없는 무기력한 사나이고 이미 처남은 정신병원에서 나온 힘센 남자들에 의해 경기도 어딘가의 병원으로 묶여서 갔다고 하고...

점차 우리는 만나는 횟수도 술자리도 엷어져가고 그는 그대로, 나는 직급이 올라 점점 바빠지는 회사일로 그렇게 지내다가 그 사이에도 여러번 계속 \'사업\'을 말아 먹고 있다는 소식을 듣다가 imf가 터지고 그는 신촌 집도, 파주의 남은 전답도 인천 송도의 금싸라기 땅도 다 깨끗이 말아드시고 깊은 알코올 중독의 세계로 빠져들어갔다. 더이상 구제불능이었다. 더구나 그가 마지막으로 투자한 택시회사가 애초 사기꾼들의 계획대로 딱 1년간 처남에게 이사 라는 거창한 자리를 주고 매달 고금리 이자를 준 뒤 부도를 내는 바람에 그는 황망하기 이를데 없는 신세가 된 것이었다. 그 투자건은 그의 고향 국민학교 동창의 사주로 연결된 것이었는데 돈을 사기 당하고 빈손이 된 건 처남 뿐이었다.

나는 2001년 날짜로 바로 오늘, 물 설고 낯 설은 홍천 서석으로 드디어 귀농을 했고 이미 그와는 연락하고 만나는 일이 끊어진지 꽤 된 연이라 자세한 그의 근황을 알지 못한채 이곳 생활을 시작하였다.

만나지는 못하고 있었어도 그가 연신 정신병원을 제 집처럼 들락거리고 어쩌다 본가에 오면 며칠이고 정신없이 술만 먹다가 못견딘 가족들이 다시 병원에 강제로 입원시키는 일이 다람쥐 쳇바퀴처럼 무한 반복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렇게 2천년대가 다 가고 다시 2010년대가 왔건만 그는 도무지 회복하지 못하고 경기도 권역 정신병원은 다 돌아다녔을 만큼 끊임없이 중독자로 살아냈다.

그사이 처남댁(교회 전도사가 되어 알콜 중독 치료사 노릇한다고 집 나가서 교회 근처에 방 얻어 살고/\'지 남편은 정신병원에 팽개쳐두고 남의 남편 치료 도우러 다닌다고?\')도 떠나고 아이들은 할아버지댁에서 돌봐주고, 처남은 계속 나왔다 들어갔다를 뫼비우스의 띠처럼... 어딜? 정신병원을. 이십 년이 넘도록 들락거린 그 병원 의사들의 치료가 적어도 처남에게는 눈꼽만치도 효과가 없었으니 국가의 지원이 무슨 소용이며 그 사이 가족의 고통은 차마 다 풀어놓을 수가 없다.

그러다 재재작년 가을(9월 초 햇살이 따사롭던 어느 날)에 처남이 우리집에 왔다. 저 스스로 이곳에 오고싶어 해서, 그리고 연로하신 장인장모가 더이상은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어서, 다행히 우리 집엔 아이들이 다 나가서 우리 부부만 있는데다가 방도 여유가 있어서, 아무튼 그래서 제 발로 들어왔다. 물론 버스 태워 보낸 장인의 수십번 당부도 헛되이 술 잔뜩 취해서 내 사는 서석 차부에까지는 무사히 왔다.

그렇게 우리와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지난 3년 사이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내 평생 겪은 그 모든 술주정뱅이와의 시간과 사건에 세제곱 하고 거기에 다시 곱하기 십만을 한 만큼의 사건과 행사(?)를 한 사람에게 겪어봤다고 하면 내 속이 시원할까.

그 철없던 시절에 좋아서 둘이 술 푸러 다니던 그 시절 한뼘 추억이 없었다면 나도 아마 돌아버렸을 것이다. 애들 어릴 때 다같이 에버랜드며 서울대공원이며 다니던 아스라한 소중한 기억과 정이 없었다면 나는 일 년은 커녕 석 달도 못되어 이 몹쓸 인간을 내쫓았을 것이다. 안사람이 그래도 제 오빠라고 성의를 다해 보살피고 걱정하는 마음을 내가 측은한 심정으로 보아주지 않았다면 하루아침에 쪽박을 깨고 내던져버렸을 것이다.

그런 나날과 시간이었다. 어느 날 사라져 걱정을 하고 있노라면 한밤 중 서울역 파출소 순경이 전화를 해와서 제발 데려가달라고 울듯이 얘기하는 전화 목소리를 들어야했다. 그러다 이 파출소에서 무조건 아무 기차에 실어서 자기 관내만 벗어나게끔 하면 하루이틀 지나 가평 경찰서에서 전화가 오고 다급하게 때론 애원조로 얘기하는 순경 전화에 우리는 데리러 갈 수 없다고 응답한다. 이것은 이십년을 알코올 중독자 아들을 상대해온 장인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신신당부하는 방침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면 하루나 이틀 뒤에 이번엔 춘천경찰서 모파출소에서 전화가 또 온다. 가평에서 또다시 무작정 기차에 태워 관내 관할 구역을 벗어나게끔 한 결과인데 무전취식에, 겨울인데 거리에 쓰러져있으니 신고받고 출동한 것이다. 역시 같은 요구와 응대. 그럼 이번엔 이틀 뒤에 강원대병원 원무과에서 전화가 온다. 경찰이 병원에 인계한 것이다. 병원에서는 그를 온갖 검사를 다 하고 그 비용을 우리에게 청구하는 것이다.

병원에서 며칠 술도 못 먹고 링겔에 식사에 기운을 차린 이 인간은 밤에 병원을 몰래 빠져 도망나가 다시 술을 먹고 사라진다. 돈? 훔치기도 하고 정 안되면 동사무소나 면사무소 복지계에 가서 얘기하면 무조건 만 원을 준다. 그럼 그 돈으로 빨간 딱지 소주 한병에 차비가 된다. 춘천에서 사라진 이틀 뒤 이번엔 멀리 충남 홍성에서 신분 조회를 하는 순경의 전화를 받는다. 이번엔 이런 일 베톄랑 순경을 만났다.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알아서 조치하겠다고 한다. 며칠 뒤 처남은 파주 어는 찜질방에서 주취폭력으로 파주경찰서에 수감되어 있다고 연락이 온다. 거긴 장인 나와바리다. 어떻게든 빼내나온다. 아직 술이 덜 취한 이 인간을 근처에서 직장 다니는 막내 처남이 새벽에 우리집으로 \'싣고\' 온다. 우리도 새벽에 깨어 기다리다 이제 열 며칠 만에 돌아오는 \'개선장군\'을 억지로 방으로 꾸겨 넣는다. 이때까지도 그는 제정신이 아니고 행색은 상거지 중의 상거지꼴이다. 메이커가 아니면 운동화를 신지 않아 안사람이 인터넷으로 구매해 사준지 한 달도 안된 k 등산화는 어디로 가고 구멍난 실내화를 신고 있다. 등산가방도 그 속에 넣어간 옷가지도 모두 없어지고 오리털 파커 대신 허름한 솜 잠바를 걸치고 있다. 당근 핸드폰은 사라지고 없고...

병원비는 어찌 되느냐고? 그 사이 원무과에서 전화가 오고 우리가 쉽게 지불할것 같지 않자 익숙한 목소리로 차분하게 그럼 검찰에 고소해서 받아낸단다. 이미 숱하게 겪은 듯한 업무처리 목소리... 그러시든가...

늘 호주머니에 우리집 전화번호 쪽지를 넣고 다닌다. 술을 그렇게 먹고 사고치고 다녀도 연락은 늘 우리집으로 온다. 집으로 돌아오고나서도 술은 쉽게 그치질 않는다. 동네 구멍가게에서 훔쳐 먹거나 읍내 나가서 취하도록 먹고나면 홍천경찰서에서 연락이 온다. 그간 서석파출소는 국립무료대리기사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이 인간 술 취하면 거리에 쓰러져있던가 아니면 제발로 무조건 파출소행이다.

두달 쯤 지나면 이곳저곳(검찰)에서 벌금종이가 날아 온다. 서대문에서 무전취식하고 길가에 세워둔 차량을 손괴했다는거다. 분명 서대문경찰서에 연행되서 갔는데 귀신이 곡할 노릇, 다음다음날엔 구로경찰서 관할 오류동에서 남의 집 창문을 깨고 난동을 부렸다는 것이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온다. 나를 도와 일한다고 술도 자제하고 열심히 내 곁에 붙어서 이런저런 일에 손을 보탠다. 언젼가 노가다에서 배운 이런저런 요령이 대단하다, 난 잔머리 그만 굴리라고 핀잔을 준다. 그러면 그 한 마디가 서운했는지 다음번 술 주정 때 반드시 나온다. \'그래 니 머리는 큰 머리고 내머리는 잔머리다 18놈아\' ㅋㅋ

여름철 사과과수원 일의 대부분은 풀깍기 작업이다. 처남을 위해 예초기를 하나 더 장만해서 둘이 깍으면 일이 쉬이 끝나 좋았다. 본인도 풀 깍는 작업을 무척 좋아하고 즐겼다. 아마 혼자 기계 돌아가는 소음에 묻혀 몇시간을 혼자 작업에 열중하고나면 속이 시원했을지도 모른다. 땀도 무척 많이 흘리는 편이라 샤워하면서 상큼한 뒷맛에 콧노래를 불렀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다시 술이 들어가고 그러면 또 몇달...겨울이 오면 일이 없어 답답하다고 또 뛰쳐나갔다. 나는 농사일은 단순함을 즐겨야 하고 그것이 매력이라고 그 맛을 알아야한다고 누누히 얘기해도 그때 뿐이었다. 그리고 내가 여기서 우리 늙어죽을 때까지 같이 농사 짓고 같이 나이 들어가면서 살자고 해도 쉬 대답을 하지 않았다. 자기도 이런 전원생활이 좋다고는 하면서도 자꾸 세상 속으로 나가고 싶어했다. 하루종일 잠 자는 시간 빼고는 누이동생이 다시 해준 핸드폰으로 누군가와 끝없이 통화했다.

어느 날은 내가 그랬다. 남자 나이 오십 중반을 넘으면 그때 그 사람의 모습이 죽을 때까지 가는 거라고. 뭘 더 변화를 바라고 자꾸 옛날처럼 세상 속에서 새로운 뭔가를 욕망하지 말라고. 그냥 여기서 이대로 농사꾼으로, 다행히 하던 사과농사니까 사과식초를 좀 가공하면서 소박하게 살자고 권유해도 듣는 귀는 없었다. 젊어서 그 많던 전답 다 말아먹고 그 사업 다 실패했는데도 여전한 욕망이 숨쉬고 있었다. 니 꼬라지를 보라고, 니나 나나 뭘 더 할 수 있느냐고 타일러도 대답은 없었다.

겨울마다 빅쇼를 시전하시고 전국을 주유하더니 이번 겨울은 웬 일인지 잠잠했다. 하긴 지난 가을 추석 전에 서울 나가서 친구와 술자리에서 칼부림을 해서 상해를 입힌 죄로 불구속 입건되어 있는 상태라 그랬는지도 모른다. 술 취해서 나에게나 안사람에게 주정하다가도 제 성질을 못이겨 부엌칼을 들고 나에게 대든 적도 부지기수였다. 참 어려운 지난 3년이었는데 내가 처음에 안사람에게 처남이 우리 집에서 와서 삼년 정도 있으면 뭔가 달라지지 않겠나, 그때도 안변하면 그건 우리가 포기해야 한다는 말을 했었다. 그 3년이 햇수로 됐고 이번 겨울을 지나면서 위의 그 사건으로 재판도 받았지만 다행히 집행유예가 되어 한시름 놓고 그랬는데 사람에게 변화의 기미가 보이는 이번 겨울이었다. 우선 그렇게 사람들을 미워하고 하던 분노가 눈에 띄게 사라졌고 또 본인의 잘못을 절대 인정하지 않던 사람이 처제에게 문자로 다 자기가 못나서 그런거라고 사죄의 뜻을 지난 1월말에 했다는 것이다. 가족으로서는 평생 처음 들어보는 반성의 소리였고 또 자기는 이곳에서 하나님, 주님 그리고 미숙님(내 안사람) 믿고 산다고 농담도 했다고 한다. 그러고니 안사람은 그간 오빠가 이곳에 살면서 하고 싶다는거, 먹고 싶다는거, 가고 싶다는 것을 단 한번도 싫다고 거절한 적이 없었다.

내가 프랑스 가기 전부터 다시 시작된 술바람이 나 없는 동안 상당해서 서울서 처남과 처제가 번갈아와서 같이 지내주고 또 무서워서 밤에는 자매가 서석읍내 여인숙에 가서 자고 아침에 들어올 정도로 또 갑자기 술을 많이 들었던 모양이다. 그러다 심장쇼크로 자기 방에서 자다가 저세상으로 아주 갔다. 그날 밤에는 빨간뚜껑 두꺼비를 다섯병이나 마셨다.

어쩌란말인가. 그사이 미운정이 들어도 너무 들어 이렇게 황망하게 젊은 나이에 가니 그 모든 사건이며 내게 했던 주정이 다 나에게 가슴에 큰 돌 하나가 얹혀진 것 같은 이 슬픔을.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는 말이, 있을 때는 저거 좀 어떻게 안되나 했던 고약했던 마음이 이제는 다 내게 후회로 되돌아오네. 아마 살아오면서 들었던 욕의 만배는 너랑 살았던 삼년 사이에 너에게 들었던 것 같다. 자기가 술을 먹고 지랄을 해도 형이라고 불러달라고, 그래서 내가 그랬지. 형이 형 같아야 형이라고 불러주지, 나이도 한 살 차이잖아? 소리쳤던게 새삼스럽네.

빈소도 없이 그저 영안실에 있다가 화장장 한줌 재로 돌아간 처남아, 지난 몇십년 얼마나 힘들었니. 이제는 좀 살만하신가. 내내 눈물이 안나오다가 자네가 가기 전날 오후에 마지막으로 찾아간 우리 동네 교회 목사님이 발인 예배를 하기위해 오셨을 때 갑자기 뜨거운 눈물이 나오던걸. 그래도 어린 조카와 더 맘 아픈 노인네가 있기에 그 앞에서 내가 대성통곡을 할 수가 없었네.

그런데 고향 선산에 수목장으로 자네를 묻어주고 이제 열흘이 지났는데 잊혀지기는커녕 매일 생각이 나네. 술 취하면 내게 자주 그랬지. \'내가 삐꾸로 보여?\' 난 그럼 대답했지. \'응. 삐꾸로 보여. 아니 삐꾸여\'
삐꾸 이 18놈아, 좋은 곳에서 잘 살거라. 이젠 나도 널 잊으련다. 그 옛날 좋던 시절 통일로 색시집에서 춤 추고 놀던 때나 늘 생각해라. 그나마 그때가 봄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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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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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함안김씨 2019-03-01
    허~! 이런 아픔을 지난 3년간 겪었군요. 참...!
    그래요 사람은 변하지 않는답니다. 아니,
    변하기도 하는데 이는 그야말로 종교적으로 말하면 성령이 임해야 된다고 합니다.
    그런 처남을 3년..참 무던히도 잘 견뎌왔었네요.
    그간 미숙씨는 마음 고생 얼마나 심했을까..?
    지난 몇 해 전 우울증으로 힘들며 외웠던 주문이 하나 있어요.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모든 것은 지나간다. 지나간다. 지나간다.
    살다보면 살아진다. 살아진다. 사라진다...!

    옆에 있으면 통음이라도 해서 위로하고 싶건만..!
    그간 두 분 맘 고생 많았어요!
  • 길벗 2019-03-02
    몸살 끝에 심한 감기 후유증으로 지금 골골하고 있습니다. 이른 봄이 와서 할 일이 태산인데 덩치는 큰 놈이 골골대고 있습니다. 기분과 몸이 모두 가라앉아 있습니다. 위로의 말씀 감사드리고 다 지나가고 다시 살아지겠지요. 형님이 가끔 이곳에 오셔서 말 건네주셔서 다행입니다.
  • 함안김씨 2019-03-02
    사람이 아프게 되는 게 몸에 면역력이 약화 되어 생긴다는데
    그 면역력을 떨어뜨리는 가장 큰 이유가 스트레스와 우울증이라고 합니다.
    몸이 너무 고단하면 면역력이 떨어지기도 하는데 마음에 병이 오면
    자연 몸에도 병이 생긴답니다.
    60 고개 넘으며 절절하게 깨달았지요.

    마음 병부터 치료해 보세요.
    마음 병 치료는 억지로라도 웃는거랍니다.
    많이 걷고, 최소 하루에 1시간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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