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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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행착오 혹은 재수

  • 길벗
  • 2007-02-17 20:3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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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로 나무 사이에 잘라낸 조생종 후지 나무 흔적이 보인다

요 며칠 혼자 사과나무 전정을 하였다. 아직 잘 모르지만 그래도 이젠 내 힘으로
조금씩 해보려고 혹 시행착오를 겪을 각오를 하고 이번 겨울에 발에 땀 나도록
뛰어다닌 보람을 맛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도 다음주에는 개원 이래 매년 전정 작업을 해주시던 김 집사님이 오시기로
되있다. 내가 해놓은 것을 서로 토론도 할 겸 또 나는 홍로만 올해 작업을 했기
때문에 후지(흔히 부사라고들 부르는)는 김 집사님께 좀더 배우려고 해서다.

오늘은 설 연휴 첫 날인데 동생 가족과 지난 주 결혼식을 올리고 신혼 여행을
다녀온 사촌 동생 종성이 내외도 왔다. 이런 와중인데도 오후에 그간 고민하던
일을 시작했다. 그 일이란 바로 작년 가을에 첫 수확을 했던 우리집 후지를 자르고
있는 것이다.

우리집에 현재 심겨져 있는 후지는 조생 후지로 4년 전에 나는 히로사키 라는
품종을 300주 주문해서 직접 실어와 심었다. 경북 김천에 있는 김천 농원에서다.
4년을 길러 지난 가을 첫 수확을 해서 팔았는데 소비자 반응이 별로 였다.

이상했다. 이럴리가 없는데..... 그러다가 이번 겨울 교육을 가서야 우리집에
심겨져 있는 후지가 히로사키가 아니라 홍장군인 것을(혹은 료까인지도 모른다)
알았다. 같은 조생계 후지인데도 맛이나 식미가 다르다는 것이었다.
겨우내 고민에 고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묘목상에는 메일을 띄웠다. 하긴 4년 전에 묘목을 사오면서 서로 전화로
주문하고 또 가서 돈을 주고 실어왔을 뿐, 그 흔한 거래 명세서 하나 받아오지
않았다. 사람 잘 믿고 또 꼼꼼하지 못한 평소의 내 성격 탓이다.
김천농원에서 내 메일을 보고 전화를 해서 약간의 다른 묘목으로 올 봄 받아오기로 했다.

지난 4년간의 노력이 한순간에 거품으로 날아가는 순간이다. 김 집사님은
묘목상에 따져서 보상을 받으라고 하지만 나는 그럴 성격이 못된다.
거래 명세서도 없지 않은가. 김천 농원 아주머니의 전화가 온 것만으로도
난 그 사람들이 그래도 착한 사람들이라고 위안을 했다. 설마 알면서 그리 했을까 싶다.

그러나 나로서는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사과사랑동호회에 들어가
이런 저런 글들을 보니 묘목상들이 소위 장난을 치는 예가 하나 둘이 아님을,
그리고 그런 것이 이 나라 장사치들의 상용 수법임을 알게 되었다.

나는 지금이야 조금 눈을 뜬 정도지만 5년 전에는 그야말로 눈 뜨고도
당하는 어리버리하고 순진한(시골 사람들과 농사에 관계된 일을 하는
사람들은 다 순수하다고 믿는 말도 안되는 생각을 가진) 도시 출신 귀농자였다.
모든 귀농자들이 다 그런 것은 물론 아니지만 나는 좀 심하게 관념적인 사람이었다고
해두자.  

아무튼 직거래 품종으로는 꽝이라고 할 수 있는 나무를 더이상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오늘 첫 톱질을 했다. 이미 만 4년을 자란 놈들이라 베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도대체 이게 뭔 재수 없는 일이란 말인가. 심느라고 고생, 한번 따 먹고 베느라고 고생.
사과 농사 경력이 수십년인 베테랑들 얘기를 들어보니 모두들 한두번씩은
품종 선택에 실패해서 다 기른 나무를 베어낸 경험이 있었다.

나도 결국 그 대열에서 피하지 못하고 겪지 않아도 좋을 일을 겪고 가는구나 싶다.
하긴 나야 뭔 죄가 있는가. 묘목을 잘 못 판 혹은 장난을 친 묘목상이 나쁜 XX이지....
쯧쯔....

시행착오라고 하기엔 이 어려운 농사 현실에서 바둥대는 귀농자에게는 너무 큰
타격이다. 결국 한꺼번에 모두 베어내지는 못하고 절반만 인기가 좋은 \'홍로\'
품종으로 대치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래서 올 가을 수확하는 후지는 모두 공판장으로만
출하하고 직거래는 \'홍로\' 품종만 하기로 하였다.

올해부터 속된 말로 이제부터 살림 좀 펴는구나 했는데 이런 시련이 있을 줄이야...
귀농 7년차에 접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농사만으로 생활이 안정이 되려면 좀더
기다려야 하나보다.

시행착오 혹은 재수, 그저 저물어가는 올해에 다 묻어두고 내일 다시 오는
새해에는 새로운 힘과 희망으로 힘찬 삽질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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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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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근 2007-02-18
    길사장님 힘!! 힘을 내시고, 아직 반이나 남았다는 긍정적 견해(컵에 물이 아직도 반이나 남았구나) 로 남은 식구에게 더욱 열정을 갖기로 마음을 먹으시고 좀 더 세상을 여러 각도로 보는 식견을 갖기로 합시다.
  • 길종각 2007-02-18
    선생님, 감사합니다. 저 혼자 넋두리로 지껄인 말인데 이렇게 위안을 주시니
    정말 고맙습니다. 작년에 주셨던 메일이 기억나 다시 열어보니 올해 선생님께서
    환갑이 되시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이 비록 세상 나이는 저보다 한참 더 드셨는데도
    뵐 때마다 젊은이 못지 않은 용기와 결단력을 가지신 분 같습니다. 후학으로서, 후배로서
    배우고 또 많이 느끼고 있습니다. 봄에 한번 다녀가실 기회가 되셔서 방문해주신다면
    영광이겠습니다. 또 뵙겠습니다.
  • 송인숙 2007-02-24
    귀농 15년이 되고 나니 귀농을 하기전에 하고 만들고 싶은 농장에 가서 머슴을 5년만 살고서 귀농을 할것을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항상 돈이 될것 같을때 사고가 생기더라구요. 그래도 긍정적으로 정직한 땅이니까 한번 믿어보시고 힘내세요.

    귀농해서 얼마지난 일입니다. 상치를 호미로 파서 심었습니다. 거름도 넣고 열심히 심었는데 하나도 안나왔습니다. 그런데 배추에 전문가이신 친정 이모부님이 오셔서 씨를 훌훌 뿌리셨는데 다 나왔습니다. 배우는 것이 끝이 없는것이 농사같습니다.... 좋은기회라 생각을 하시구요... 힘내세요. 태양이 엄마
  • 길종각 2007-02-24
    태양이 어머님, 새해 건강하시고 농원에 많은 발전 있기를 기원합니다.
    뭐를 하던지 다 시행착오를 조금씩은 거치면서 성장해나가는 것 같습니다.
    시간 나는대로 올봄에는 꼭 태양이네 집에 안사람과 다녀올 생각입니다.
    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 김천농원 2007-05-22
    안녕하세요! 김천농원입니다. 잘린 나무사진을 보니 무척 안타깝습니다. 직접 기르신 나무를 자를때야 심정을.. 어떻게 제가 드릴말씀이 없습니다. 그 당시 제가 메일을 읽고 저희 어머님께 말씀드려서 연락이 된걸로 알고 있습니다. 저희가 도/소매를 하는 입장에 묘목수급이 딸리면 다른 농원 또는 개인한테 묘목을 사서 드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희도 되도록 아는 분이나 믿을수 있는 곳에서 거래를 해서 가져올려고 노력을 합니다. 어린 묘목을 가져오면
    비슷해 보여서 구분하기가 힘이 듦이다. 저희가 일부로 그렇게 묘목을 다른 품종을 알면서 팔지는 않습니다. 오해가 없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새로 심으신 묘목은 잘 자라기를 바라구요 앞으로 저희 농원가 거래를 하기는 저희가 기대하기 어렵겠지만 귀농해서 열심히 농사지으시는데 저희가 본의아니게 피해를 드린것 같습니다.
    오늘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우연히 보고 참 마음히 답답함을 저도 느꼈습니다.
    하시는일 다 잘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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