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이야기

농사이야기

지나간 이야기들-일곱번째

  • 길벗
  • 2004-10-02 14:3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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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글은 2001년 4월부터 2002년 1월까지 2주에 한번씩(나중엔 일주일에 한번) <홍천통신>이라는
제목으로 한겨레 신문에 연재되었던 것입니다. 총 28회가 게재되었으며 그 중 몇 편만 이곳에
옮겨 놓습니다. 그때는 본명을 밝히기 싫어 '김명식'이라는 가명으로 글이 올랐습니다. 인터넷 한겨레에서 '지난기사'를 검색하면 전편을 볼 수 있습니다.


<홍천통신>

- 도시의 삶을 훌훌 정리하고 농촌으로 떠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그러나 익숙했던 도시적 삶과 생활을 단절하고 농촌에 뿌리내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들이 겪는 어려움과 보람을 함께 나누기 위해 10여년간의 망서림 끝에 올봄 홍천으로 귀농한 김명식씨의 귀농일기를 연재한다. 김씨는 잘 나가던 대기업의 엘리트 사원 출신이다(편집자).


4월6일 우리 가족은 드디어 강원도 홍천으로 귀농했다. 이미 귀농이 사회적 화두로 등장한
지도 꽤 된 것 같고,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지만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도시를 떠나 시골로
가는 우리 가족을 여전히 신기하고 별스럽게 여기는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양가 부모님을 비롯해 직장의 동료들과 친구들의 첫번째 질문은 똑같이 시골 가서 뭐해 먹
고 살려고 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리고 두번째 질문은 아이들 학업 문제였다. 특히 장모님의
우리 아이들에 대한 걱정은 대단해서 이사오는 날까지도 마음을 못내 놓지 못하셨다. 남들
은 아이들 학교 문제로 서울로 오지 못해 안달인데 어찌해서 거꾸로 가느냐고 말이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먹고 사는 일(직장) 때문에 서울을 떠나지 못한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
어서 그 점이 두려웠고 시골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지 꽤나 되었지만 40대에 접어들도
록 서울서 머뭇거렸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도시가 우리 삶을 위해 시골과 비교할 수 없
을 정도로 많은 것을 갖추고 있다고 여기고 있는 그 모든 것이 사실은 하나의 관념에 지나
지 않고 또 허위의식이라는 것을 분명히 깨달았을 때 우리는 이제는 정말 떠나야 한다고 결
정했다.

올해 중학교에 들어간 큰 아이를 비롯한 두 아이들 학업 문제에 대해서도 우리 부부는 서울
보다는 시골 생활이, 그리고 학교보다는 가정에서의 교육이 더욱 유익하다고 생각했다. 오늘
날 학교가 우리 아이들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는가. 대학 가는 것에 모든 것이 매여 있는
우리의 교육 현실이 과연 우리 아이들의 삶과 가치관에 어떤 유익한 것을 가져다 줄까 생각
해 보면 도리질을 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시골로 꼭 가야만 하는가고 반문할지도 모르지만 그건 개인의 선택과 의지
탓이라고 여겨진다.

우리 부부는 이곳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자연적인 삶을 사는 것이 단순히 생태적인 삶의 추
구를 넘어 그 동안의 습관적인 신앙에서 벗어나 좀더 깊은 영적 체험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아울러 기대하고 있다. (2001.4.19)




전화·TV 없는 삶 소중함 되찾는 시간


이 골짜기로 이사를 오고나서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몇가지 벌어졌다. 그 덕분에 나의 뜻과
는 전혀 상관없이 지난 한 달 넘게 살아야 했는데 지내고 보니 오히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 일들이었다.
그 일이란 바로 우리 가족이 3무(三無)속에서 살아온 것을 말한다. 우리가 겪어야 했던 3무
란 전화가 없고, 텔레비전이 없고 신문이 없다는 이야기다. 전화가 없이 살 수 있다니. 이
골짜기에서는 손전화도 연결되질 않았다.

올 봄에 아랫 마을과 이 골짜기까지도 지역 유선방송 회사에서 무료로 선로를 깔아주어서
연결만 하면 텔레비전은 볼 수 있지만 우리 가족은 앞으로도 텔레비전 만큼은 없이 살아볼
생각이다.

이런 상황이 우리 가족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은 우선 완벽하게 자신과 서로에게 충실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서울 생활에선 눈 뜨면 가족보다 먼저 신문부터 찾았고, 방송부터 틀었었
다. 아침부터 온갖 세상사 잡동사니를 머리와 마음에 두고 살아야 했던 삶이 나와 우리 가
족에게 무슨 도움을 주었던가 반추하게 된다. 그래서 그런 소음과 온갖 쓰레기 같은 정보
속에 스스로 매여 살면서도 입만 열면 가족간의 대화와 이해 그리고 시간이 부족하다고 하
지는 않았던가 반성해보았다.

반성의 요소는 또 있었다. 현대문명의 총아인 통신 수단이야말로 더 많이 모으고 더 높이
오르기를 원하는 우리의 끝없는 욕망을 실현시키는 도구라고 믿어 왔던 것은 아닌가.

그러나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런 것들이 없이 살아본 결과 우리가 얼마나 바보스러운 생각을
하며 살아왔는지, 얼마나 많은 불필요한 것들에 우리의 소중한 시간과 에너지를 몰입하면서
살아왔는지 알 수 있었다. 우리 삶의 소중한 내면은 결코 그런 외부의 소음과 정보의 홍수
가 채워주는 것이 아니라 단순하고 소박한 삶 속에서 우리의 머리가 맑아지는 것을 느끼면
서 충만하게 채워지는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편리하다는 것 또한 이미 우리 삶의 일부분이 되어버린 신화 가운데 하나인 것 같다. 우리
는 모두 불편함을 싫어하고 또 제거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불편함은 우리에게
몸을 사용하게 해준다. 디지털보다 아날로그에 더욱 향수를 느끼는 것도 아마 이런 류의 육
체적 감각에 대한 그리움일 것이다. 사는 맛도 느끼고 사람과의 관계도 새삼 인식하게 하는
것이 불편함의 미덕인 것 같다.

비록 전화는 뒤늦게나마 개통이 되었지만 나머지 통신수단에 대해선 관심이 없다. 없이 산
다는 것, 불편하게 산다는 것, 그 속에 뭔가 소중한 것이 있다고 생각된다.(2001.5.17)




농사속에 찾는 뜻있는 삶


오늘날 농업은 가장 뒤처진 업종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농부 또한 꺼리는 직업이 되었다. 농
사는 “돈이 안 된다”는 이유일텐데, 이곳에서도 평생 농사를 지어 온 나이 드신 분들이
허리가 휘도록 일한 이유가 바로 당신의 자식들을 가난한 농사꾼으로 만들지 않게 하기 위
해서였다. 열심히 농사를 지어도 결국 가난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끔 농사로 성공한 이의 사례가 보도되는 것을 본다. 무슨 작물을 어떻게 했고 어떤 아이
디어를 농사에 실용화했고 그래서 연수입이 몇 천만원을 웃돈다는 것이 대개의 내용이다.
게다가 요즘은 농사도 벤처사업으로 인정받는 시대가 되었으니, 실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농사도 돈이 된다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도시에 살든 농촌에 살든 요즘 사람들의 머리 속은 온통 돈인 것 같다. 아마 농사도 돈만
된다면 짓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설 것이다.

현대에 사는 우리는 모두 돈에 매여 있는 것 같다. 돈의 노예다. 그런데 자본주의라는 괴물
은 우리 자신이 노예란 것을 알지 못하도록 이것을 신화화하고 가치화했다. 그래서 사람들
은 아예 노골적으로 그것을 추구하고, 그런 마음을 부끄러워 하지도 않는다. 부자가 되는 법
을 기술한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는 세상이다.

농사, 그것도 유기농업을 하여 먹고 살아 보겠다고 작정한 것은 누가 생각해도 돈과는 먼
생각이다. 내게도 많은 사람들이 물어온다. “왜 굳이 귀농을 했나요?”

20, 30대를 도시의 대기업 조직 속에서 속물처럼 살아오면서 반성의 골이 깊었나 보다. 오래
전에 글로 접한 함석헌 선생의 “농사 짓는 삶이 가장 귀한 삶이다”라는 말씀이 귀농의 씨
앗이었고, 지난 4월 이곳 우리집까지 오셔서 기도해주신 오재길 선생(정농회 초대 회장.
1961년 마흔 살에 귀농)의 삶과 사상이 힘을 북돋워준 거름이었다.

오 선생은 유기농업하려면 `3대 가난'을 각오해야 한다고 하셨는데 나는 스스로 농업을 택
해 떠난 이들의 삶을 `자발적 가난'이라고 불러본다. 모두가 높아지려고만 하고 많이 벌려고
만 하는 세상에, 좀 낮아지고 남에게 자랑할 것 없는 가난한 삶을 사는 것이 진정으로 뜻있
는 삶일 것이다.(2001.6.21)




도시 떠나 시골서 ‘행복을 꿈꾸는 사람들’


<홍천통신>을 연재한 후로 가끔 낯 모르는 이들이 전화를 한다. 그러다 얼마전 30대 초반
의 부부를 몇번의 전화 끝에 서울 가는 길에 만나 차를 한잔 하며 서너 시간 얘기를 나눴
다. 이들은 자동차도 거부한 채 아주 궁벽진 곳으로 들어가 단 둘이 텃밭을 가꾸며 자연 속
에서 사는 것을 꿈꾸는 이들이었다. 아이도 아직은 없으니 그저 부부의 생계만 꾸리면 되는
데 일단 모든 문명적 요소들을 거부하며 사는 그런 삶 자체에 의미를 두는 듯 했다.

그 뒤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 역시 도시를 뒤로 하고 일부러 시골로 들어와 살긴 하
지만 나는 가족들 생계를 걱정하는 소시민이다. 그리고 그이들처럼 난방도 하지 않는 방에
서 이 추운 겨울을 날 생각은 더더욱 하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이다. 그래서 생각해보면 우
리는 다 각자 서로 다른 생각과 모습으로 살아가는데 또한 각자는 이 세상에 어떤 의미를
두고 매일을 보내는 것일까.

다석 유영모는 매일 날 수를 세며 살았다. 우리가 잠들며 다시 깨는 것을 한 일생으로 여기
며 산 까닭이다. 그만큼 매일의 삶에 진지할 수 밖에 없는 삶인 것이다. 시골로 오려고 마음
먹은 이들이 내 주위에도 아주 많다. 비록 실행에 곧바로 옮기지 못할 뿐 마음은 그렇다는
얘기다. 도시에 살던 시골에 살던 그게 무어 대순가.

과연 무엇 때문에 우리는 나날의 삶을 이어가는 것인가. 평범한 눈으로 보면 모두들 돈 벌
자는 세태다. 그래서 자신의 나날의 값어치를 벌어들이는 돈으로 그 결과를 셈하자는 사람
들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돈과는 거리를 두고 그저 살아남는(?) 혹은 살아가는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이 삶의 매일 매일을 견디는 것일까. 나는 아직 그 답을 모른 채 좌충우돌하고
있다.

오늘은 철민 아빠와 긴 시간 얘기를 나눴다. 그이도 3년 전에 도시 생활을 청산하고 농사지
어 먹고 살려고 이곳에 온 이다. 나에게 귀농 선배 노릇을 자처하는 그이의 얘기인즉 이렇
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농사가 돈이 안되고 힘든 것은 이미 겪은 일이다. 그런
데도 이곳에선 사람사는 냄새가 나고 삶에 위로가 되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은 더 이상 도시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했다. 과연 이 사람을 잡아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2001.11.14)




텅빈 시골 “사람냄새가 정겹다”


60년대와 70년대의 강원도는 아직 화전민들이 산골짜기 구석구석에 살고 있었고 그때는 모
두들 구들집이었다. 강원도에서 나고 자란 나는 아궁이에 나무를 때고 그 위에 가마솥을 걸
고 밥을 해먹고 살았던 그때가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10살이 넘으면 할아버지가 지게를
하나 만들어 들려 주어 제 밥벌이(?)를 하게끔 하도록 한 것도 기억난다. 그래서 아이들도
겨울이면 나무를 하러 산으로 올라가곤 했다.

우리 집은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에야 전기가 들어왔다. 나는 학교를 부지런히 다녔다. 더
이상 아버지처럼 집에서 농사만 짓고 한문만을 가르치던 시대는 아니었던 것이다. 산업화의
바람이 불어닥쳐서 마을 사람들이 하나씩 둘씩 대처로 떠나기 시작했는데 우리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내가 산간벽지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를 춘천으로 유학간 뒤에는 그만 대
도시로 이농을 해버렸다. 아버지는 그때부터 도시에서 막노동자 생활도 하고 장사도 하면서
우리 형제를 대학까지 보냈다.

그러고보면 나는 60년대 초반의 베이비 붐 세대로 태어나서 시골의 순수한 농경생활을 맛본
마지막 세대이다. 돌이켜보면 이제 겨우 나이 40인데 그동안에 농경사회와 산업사회와 또
정보화 사회에 이르기까지 쉴 새 없이 바뀌는 세상에서 살아나온 것이 나와 우리 세대의 인
생인 것 같다.

과연 무엇 때문에 이 세상이 이처럼 바쁘게 변화하는지, 또 왜 거기에 적응하
지 않으면 안되는 것처럼 생각하고 노력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은 가질 새도 없었던
것 같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서, 때로는 이기기 위해서 학교도 직장도 다닌 것 같다. 마치
계속 이기고 살아남는 것이 우리 인생의 최고 최상의 가치이기라도 한 것처럼 착각하고 말
이다.

농사도 소위 경쟁시대라고들 한다. 남보다 생각이 앞서야 하고 기술이 앞서야 한다고 이구
동성으로 떠든다. 모든 것을 남과의 비교우위 시각에서 바라보도록 교육받고 자란 우리들이
고 이 사회의 세태다.

과연 그런가. 도대체 그런 이데올로기가 어디서 와서 우리를 이토록 숨막히게 이기적이게
하는가. 25년만에 나는 다시 그 강원도 골짜기로 `컴백'을 했다. 다들 도시로 나간 그 빈 자
리에 다시 돌아온 것이다. 그런데 이곳은 아직 살만한 곳이라는 것을 느꼈다. 사람 냄새가
난다. 정말 잘 돌아왔다.(2001.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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